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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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여러번 이사를 다녔다. 길을 사이에 두고 이사를 간다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와 동생들은 그저 뛰어노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문 밖으로 나오면 친구들을 만날수 있다는 사실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다보면 그런 추억과 상반되는 장면들이 여러가지 떠오른다. 책을 읽고 어린시절을 반추하는 나의 목구멍에서 왠지 모를 쓴맛이 느껴진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뒷편을 바라보게 되었다. 잊고있던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느껴서 내 안에 자리 잡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의 기준이 무엇인지 감지했다. 어른이 되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경제력에 빗대어 판단하려는 속물스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조장되는 편 가르기에 다수의 편에 서려는 옹졸함을 깨달았다.

<불과 나의 자서전>의 주인공 최홍이 주해와 수아를 만나며 부모님이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남일동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남일동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주해의 모습을, 주해와의 교류를 통해 회사 내 왕따 문제로 괴롭힘을 당한 아픔을 극복하려는 최홍의 의지가 보이는 것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개인의 노력이라는 불씨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감동했다. 터무니없이 작다고 생각한 개인의 노력들이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를 삭제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희망을 마주하고 나니 어쩌면 모든 것에 대해 체념하며 살았던 우리의 태도가 그 경계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대상화하여 가치 판단하고 그에 따른 경계를 만들어 철저하게 저쪽 편의 그들과 구분 지으려는 마음. 그것은 다수에 소속되어 낙오되지 않으려는 근원적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주해의 노력과 같은 작은 불씨가 큰 불로 번져서 연대의 힘을 모두가 느끼게 된다면 극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남일동 골목에 쓰레기가 버려진 것을 보고 현실의 냉혹함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또한 최홍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고 본인이 경험했음에도 경계선 건너편의 불안과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왠지 모를 패배감도 느껴졌다. 그런 최홍에게 ‘불’은 남과 다르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경계의 소멸을 간절히 바라는 의지의 표현 도구였다.

나의 인생 속 중첩된 기억들은 안정감이 세상살이의 최고 덕목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아이를 키우는 어른인 나 역시 집에 대한 욕망은 불안감 없이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것들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 그것을 가시적인 효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내가 가진 집일 거란 생각,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행복을 규정짓는 것이 내가 가진 것, 나의 안정감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최홍이 주해와 수아를 만나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불을 통해 현실을 직시했듯이 나 역시 나의 의식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만 잠식하지 않도록 삶의 기준을 확고하게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게 <불과 나의 자서전>이란 책은 마치 주인공 최홍의 ‘불’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던 생각과 행동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것들, 부끄러운 것들의 발화를 통해 더 깊이 삶의 가치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때 골목과 산으로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놀았던 기억만 간직하고 싶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내 인생을 가로지르는 자서전을 쓰게 될 때 내 인생은 경계와 분할이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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