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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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여행이란 단어는 길이나 지도, 낯선 나라, 인상 깊고 아름다운 풍광, 새로운 문물, 혹은 새로운 자신, 두근거림이나 자유, 혹은 모험이나 떠남, 대개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현대인이 얻게 되는 어떤 종류의 비일상적 체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단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적인 꿈, 고통의 또다른 이름으로서의 꿈, 혹은 정체불명의 그리움,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찬 발자국, 혹은 그러한 감정의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은밀하고도 슬픈 몽환과 동의어에 불과할 것이다. (p.12)

 

 

십년도 더 전에 몽골에 간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에 속해있는 내몽골이었다. 우연히 가게 되었으며 중국 여행 중이었으므로 저녁에 출발한 여행은 침대기차에서 하룻밤과 초원에 있는 게르에서의 하룻밤만을 보내고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기차에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던 초원과 지평선 그리고 기차에서 내렸을 때 몸에 딱 맞는 것 같은 기온이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공기가 너무 신선해 내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날아갈 듯 가벼워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먹었던 양고기와 전통 씨름 대회들 커다란 새장에 갇혀 있던 커다란 솔개, 그리고 새벽 3시의 밤하늘, 너무 많은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 같이 무서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초원의 밤하늘.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가고 싶다고 느꼈지만 그런 기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평소 여행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배수아라는 작가의 책이기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배수아가 몽골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그 험난한, 더구나 잘 알려지지도 않은 몽골의 깊숙한 알타이라는 곳에 다녀왔다니, 그러나 예상했듯이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알타이에 다녀온 일들을 서술한다.

 

그녀는 독일어로 글을 쓰는 몽골인 갈잔 치낙귀향이라는 책을 읽고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먼 길을 떠났다. 그에 대해 찾아보다가 일 년에 한 번 그가 있는 알타이로 가는 여행 코스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유럽인들과 함께 그곳에 가게 된다. 3주 동안 그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전기도 없고 신선한 과일과 커피도 없는 초원에서 보내게 된다. 어쩌면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것들이, 알겠지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아마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이 그곳에 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러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스럽다.

 

그녀의 문장은 내 입맛에 맞아서 단숨에 읽히는데 가끔은 무척이나 길다. 그래서 한 문장을 읽다가 끊기지 않아서 잠시 쉬어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호흡에 익숙해져서 그 긴 문장을 천천히 곱씹으며 여러 번 읽을 때도 있다. 맛난 음식을 천천히 즐기는 기분이다. 그녀가 표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마치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소설가들의 에세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에세이는 소설만큼이나 좋으며 그 경계도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그녀의 문장을 너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매우 주관적으로 그녀의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대부분 책을 어둠 속에서 스텐드만 켜놓고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 여행은 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갔던 내몽골이 떠올라 완전 낯설지만은 않았다. 좋은 책은 천천히 오래도록 보고 싶다. 그녀의 책을 읽는 며칠 동안 그녀가 말하는 그 끝없는 언덕으로 이루어진 초원과 얼음같이 차가운 물과 느리게 걷는 말, 유목민들의 순박한 미소들이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꼈다. 아쉬우면서 홀가분하면서 아직은 여행지의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 여운은 더욱 짙고 길게 남았는데 책 제목이 왜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일까. 라는 의문이 풀리는 마지막 문단 때문이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전혀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담담한 몇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이 묘사하고 있는 그 풍경과 그들의 감정들에 깊이 동요되면서 알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이미지가 남게 되었다. 멀리서 보이는 낯선 유목민 여인, 델을 입은 그녀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덧붙여 이 책은 난다의 걸어본다시리즈 중의 하나인데 시리즈 목록을 보니 꽤나 흥미로워보였다. 단순한 여행기들이 아닌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특정한 곳을 에세이로 풀어낸 글들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보이니 그들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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