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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그렇다면 이 작품을 쓰면서 그가 왜 그렇게 파멸한 거죠”
“작가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 파괴될 수 있거든.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에선 그럴 수 있어. 그 이상도 가능하고.”
도서관에 가기 전에 들춰 본 다이어리에서 오래 전에 메모 해 놓은 읽을 책 목록을 발견했다. 신간 소개를 보면서 읽어볼만한 책들을 가끔 적어 두었는데 일 년 전쯤의 메모가 이제야 눈에 띄었다. 몇 개 적힌 리스트 중에 읽은 책은 거의 없었고 어떤 내용의 책이어서 흥미를 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유령 퇴장』이 책 또한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필립 로스라는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책 한 권 쯤은 읽었을 것 같았지만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책을 몇 장 읽어갈 때 느꼈던 것 역시 노련한 작가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망설이거나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성큼 성큼 그의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책의 뒷면에 ‘주커먼 시리즈의 완결판’ 이라고 적힌 글을 보고 나서야 주인공 네이선 주커먼이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의 목가』『휴먼 스테인』『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책들에서도 은둔하는 늙은 작가로 네이선 주커먼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제목과 같이 주커먼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갈 쯤에 드는 생각은 이것은 굉장히 미국적인 소설이라는 것이다.(미국 소설이 대부분 그렇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유대인의 삶 그리고 상류층의 사람들,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그들의 정치와 문학의 역사까지 속속들이 언급하는 이 작가는 미국이 사랑할만한 작가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소설은 낯선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캐릭터들이 있기에 낯설지 않다. 전립선 암에 걸린 후 요실금에 시달리고 이제 점점 기억력까지 쇠퇴해져가는 늙은 유대인 작가 네이선 주커먼과 젊은 작가지망생 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주커먼이 숭배했던 이제는 망자인 로노프라는 작가와 그의 애인 에이미, 로노프의 비밀을 폭로하려는 혈기넘치는 전기작가.
“괜찮았었죠. 지난 몇 달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망할 게 재발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늘 그런 식이죠. 운명이 등 뒤에 숨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왁!’ 하고 소릴 지르죠. 처음 종양이 생겼을 땐, 그런 게 생긴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짓들을 했어요.……”
이 모든 인물들은 주커먼이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 오랜만에 뉴욕에 오게 되면서 등장한다. 뉴욕에 머물던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가 과거의 인물들과 우연히 얽히고설키면서, 잊고 있었던 성적 욕망까지 그의 머릿속을 헤집게 되면서, 마치 늙은 작가가 퇴장하기 전 마지막 축제를 하듯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소설 속의 소설처럼 주커먼이 제이미와의 일을 상상하며 써내려간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현실을 딛고 있는 작가가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지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서 늙어가는 육체를 가진 인간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젊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싸움하는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그러나 흥미롭고 멋진 작품일 뿐 나에게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립 로스는 이미 2012년 절필을 선언했다고 하니 그의 마지막 책부터 조금은 궁금해서 읽어볼 것 같다.
그녀 고통에서 도망치기요.
그 무슨 고통에서?
그녀 존재하는 것의 고통요.
그 그건 자네 이야기 아닌가?
그녀 어쩌면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이죠. 맞아요, 그게 제가 실행하려는 극단적인 조치를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선생님의 경우엔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이 문제가 아니에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죠. 무언가의 존재 속에 존재하는 게 문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