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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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라는 한 사람의 성숙해져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단순한 열정, 집착 등에서 보였던 모습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이해도 간다. 같은 사람이라고 곧바로 생각하기 어려울만큼 다른 모습. 한 사람의 몇 십년을 이렇게 간단히 읽을 수 있다는 문학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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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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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을 되돌아보며,
올 해 가장 행복한 순간 TOP 3를 꼽으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있게 그 중 하나로 '아니 에르노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라고 답했다.
전공 작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사회적 자서전(auto-socio-biographie) 등 여러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게 에르노가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용기'에서 온다. 사람들이 내게 에르노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뭐라고 말할지는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제 답을 찾은 듯 하다. (이때의 답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유리구슬 하나를 찾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가 에르노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 나와도 결이 안 맞는 부분은 있다고!)

그 기쁨을 안고 읽게 된 『여자아이 기억』은 에르노가 70이 넘어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써낸 글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 않은가? 1958년 여름, 자신이 18살에 여름방학 캠프 지도교사로 일했던 때의 기억을 소재로 쓴 글이다. 남성과의 성적 경험이 없던 여자아이가 함께 지내던 다른 지도교사들에게 성적 대상이 되어 희롱당하지만, 모욕적으로 느끼기는커녕 자신이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순진하게도 뿌듯해한다. 그 여름 이후 여자아이는 완전히 달라졌으나, 마치 어떤 주술에 의해 50여 년간 가둬져 있었던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간 언제나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글쓰기로 하여금 세상에 밝혀왔으나 『여자아이 기억』은 그중에서도 언제나 비어있던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작가의 작품 세계를 채우는 마지막 퍼즐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 나 또한 그간 이 시기의 이야기에 무언가 결손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매우 반가웠다.

본론보다도 인상깊게 읽었던 『여자아이 기억』의 도입부는, 중심 서사(premier récit)와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아 언뜻 보기에는 ‘1958년 여름’과는 전혀 관련 없는 듯한 무심한 두 장 분량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이 『여자아이 기억』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서문과도 같은 이 글이 바로 그 ‘여자아이’에 관한 설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술자는 ‘자신’이었던 1958년 여자아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곧 서술자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서술자가 글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인 2013년과 2015년, ‘여자아이’가 사는 1958년, 그 사이의 여러 해의 사건들을 단편적으로 등장시키며 자유롭게 넘나든다. 주된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이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며, 그 중간중간 현재 및 또 다른 과거의 이야기들이 함께 삽입되어 있다. 에르노의 작품이 낯선 독자라면 이러한 구성을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서술자의 독백과도 같은 도입부를 통해 앞으로의 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길잡이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연령 뿐 아니라 사회적, 성적으로 미숙했던 ‘1958년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견고한 의식 없이 ‘타인의 욕망과 의지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담아냈으며,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자가 당시의 사건에 대해 갖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풀어낸 글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독자는 타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듯한 두근거림, 기대, 혹은 모종의 죄의식을 안고 독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신 vous’이라는 명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독자는 마치 이 글이 자신의 이야기와도 닮아있을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Il y a des êtres ~’로 시작하는 문장 속 복수(pluriel)의 지칭 또한 이 이야기가 오직 한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서술의 대상인 ‘여자아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범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동시에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서술자’로, 또다시 ‘독자 혹은 어떤 사람들(des êtres)’이라는 불특정한 광범위로 확대되는 경험의 공유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지니는 '사회적 자서전'으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58년의 여자아이’는 무엇이 옳은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선택할지 알지 못한다. 그저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이후 자신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는 오래도록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받아들이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 서술자는 드디어 대상으로 전락했던 여자아이를 구출해내고, 주체로 설 수 있게 된다. 작품의 초입에서 방학 캠프의 현관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하던 서술자는 결국 자신을 옥죄던 사건을 떨쳐내고, 방학 캠프를 확실히 떠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글쓰기 행위를 마치는 서술자는 그토록 잊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 기억이 벌써 지워져 가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1958년의 여자아이’를 구출해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냈음을 의미하며,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기억에 갇혀있지 않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워진 나이에, 자신에게 시간을 초월해 살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과업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행했다고 보인다.

삶이 자신에게 준 것, 동시에 자신이 이루어낸 삶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어려운 것은 깨우치고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를 모두 제쳐두고라도, 나는 이 점이 에르노의 가장 큰 용기라고 믿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며, 단 한 번도 개인과 사회를 분리한 적이 없다고 한 그녀의 말에도 동의한다. 이 사회에 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쉽게 살기는 정말 힘들다. 그 속에서 치이고 치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우뚝 서는 것. 지금 내게 필요한 혹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 용기를 배우게 해주기에, 어쩌면 그 용기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글이기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이처럼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그녀와는 48년, 9,384km 떨어져 있는 내게 울린다는 것이 아름다워, 문학이 좋다. 후회하지 않을 용기, 현명한 결단을 내릴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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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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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에르노의 작품을 접한 것은 《사건》이었고, 그 후 바로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었다. 《부끄러움》, 《한 여자》,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 작가가 '이제부터 사실만 쓰겠다'고 공언했던 것과 같이 이들은 모두 자전적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들은 진솔하고 민망하리만치 솔직하며, 강렬한 데가 있다. 에르노의 데뷔작은 드니즈라는 이름의 소녀가 주인공인 소설이었고, 사실 이 또한 자전적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서는 한층 더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모든 천박한 용어들과 현실보다 적나라한 경험, 감정들..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데뷔작이기 때문에 그저 작가로서 독자를 부드럽게 안는 스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긴 이왕 이런 내용을 쓰기로 한 이상 무엇이 문제겠는가마는.

에르노는 계속해서 자신이 왔다갔다 헤매야 했던 두 세계를 언급한다. 그는 한 노동자와 강인했던 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고, 후에는 학생이(여기서 학생이라는 말은 남들은 흔히 될 수 없는, 12살에 공장으로 가지 않고 대수학을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더 후에는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된' 것은 그의 안에 있는 것 모두를 절대 보여줄 수 없다. 오히려 그 쪽, 문화적인 요소들은 모두 후천적으로 배워낸 것이다. 그는 평생 부모님의 식료품점과 카페,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상스러운 파롤들을, 결국 자신의 삶이었던 것들을 혐오했다. 아니, 그것들이 자신의 삶이었고 때문에 혐오했던 것이다. 그의 부모는 공부하는 학생인 딸을, 심지어 언제나 좋은 성적만을 가져오는 그 딸을 자랑스러워했지만 남들 앞에서 자랑스러워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피하려 애썼다. 그들이 딸(드니즈 혹은 아니)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혹은 우월감 내지는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에 지지했는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이미 느꼈던 것 같다. 자기들의 딸이 이미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한 행동 양식을 터득한다. 공부를 통해 좋은 평판을 얻어내는 것. 자신의 카페에서 겪은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고 책에서 본 여러 고성과 관광지들을 꿈꾸듯이 말하는 것, 냉장고가 생겨 차가운 요거트를 대접할 수 있게 되어도 절대 학교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는 것.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동시에 다른 모든 여자아이들처럼 자신과 남들의 성에 눈을 뜬다. 시끌벅적한 음담패설과 뒤뜰에서 아무렇게나 소변을 보는 더러운 곳에 살았어도 어머니는 항상 아이를 밀어냈다. 드니즈가 다른 남자아이와 함께 걷는 것을, 말 섞는 것을 본다면 어머니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드니즈는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둥이를 맞대고' 다니는 것 까지 들켰다. 그 순간 어머니가 느꼈을 부끄러움. 모범생이자 '더러운 년'인 드니즈가 느꼈을 부끄러움. 평생 자신의 집이 카페라는 것에서,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사실에서 느꼈을 부끄러움.

이 모든 폭력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빈 옷장을 열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한다.

《빈 옷장》의 모든 페이지에서 나는 내가 읽은 그의 다른 모든 작품들을 느꼈다. 마치 세상 모든 존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듯이. 작가의 칼 같은 글쓰기, 백색의 글쓰기가 다시금 여실히 느껴지는 글이었다. 석사 논문을 에르노로 쓰기로 정하고, 이번에도 언어의 사용과 그녀가 속했던 두 세계의 괴리에 집중하여 읽어보았다. 번역에서 약간의 의문점이 없었던 바는 아니었고, 원문을 살펴보며 다시 비교해보려 한다. 에르노의 세계에서 언어란 모든 형상이자 질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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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2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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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담은 등장인물들의 말과, 그것을 충실하게 담아낸 번역이 매력적인 작품.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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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대놓고 '마음을 전하는 이야기' 라는 표어를 달고 나오는 따뜻한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번 들어왔던 그저 그런 얘기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의 출판과 거의 맞물려 이 책을 알게 되고 또 선물 받았다. '언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면 또 그렇게 관심이 가는데 마침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하루 반나절 만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너무나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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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려는데 그 수단인 언어를 잃어버려 가는 미쉬카 할머니. 잊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기에 그 안타까움이 본인에게는 얼마나 절실할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할머니를 바라보는 마리와 제롬 두 사람의 시선도 연민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응시라는 생각이 들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미쉬카와 같은 환자들을 수도 없이 만났을 제롬이 그 사람에게만 특별히 가지는 그 감정을 읽어갈 때 나 또한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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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자신이 말을 잃는 것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그래서 제롬에게도 초조한 듯, 편지를 써라, 아버지를 찾아가라 재촉한다. 과연 그는 아버지와 연을 이어갔을까? 확실한 것은 미쉬카 할머니의 그 말들이 나에게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끔 했다. 이 책이 참 좋아서 엄마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건네주었고 내 고마운 사람에게도 한 권 더 사서 선물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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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이게 불어로 뭐였을까 원문이 너무 궁금해지는 센스있는 번역도 이 책의 중요한 포인트다. 정작 본인은 부족한 점이 있어 아쉽다고 하셨지만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는 듯 한 번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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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쉬카 할머니가 이제 영원한 꿈 속에서 그 누구의 화도 보지 않기를, 그 따스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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