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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으로 아는 것들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머리가 말랑말랑해졌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처럼 나는 마음껏 네 눈을 통해 네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네가 만든 그 세계 속에서 놀아보고 싶다. 그리고 너를 내 눈 속에 집어넣고 내 머릿속에서 내가 상상한 것들을 마음껏 즐기게 하고 싶다. 물론 내 머릿속의 상상들이 너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내 눈은 단단하게 닫혀있고 나의 뇌는 너무 딱딱하다. 나의 표현들은, 감각들은 내 몸이 흐느적대는 것과는 반대로 너무 경직되어 있다.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을 앞두고 친구가 책 한권을 선물했다. 호어스트 에버스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라는 책이었다. 요일별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이었는데(그게 소설이었는지는 생각해보니 확실하지 않다) 금요일은 정말 끝내주게 멋지게 묘사되어 있었다. 단순하지만 그의 글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지금 내 감각들이 굳어있다는 걸 느끼며 이 책을 찾게 되었다. 그의 말랑말랑한 표현들이 필요했다. 어이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그러나 웃음을 멈추지 않게 하는 그의 문장들이 필요했다.
전시회에는 그림 말고도, 재미있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뿐 이케아에서 보는 것들과 흡사한 가구들이 출품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이름은 타고나야 한다. 내 이름은 재미가 없다. 이건 우리 집에서 이케아 가구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보다 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예전에 우리 집에도 이케아 가구들이 좀 있었을 때 나는 장난삼아 그 이름들을 우편함에 죽 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내 안락의자가 우편물을 더 많이 받게 되는 순간이 오고 말았는데, 그건 정말 우울한 일이었다. 얼마 후 내 안락의자는 파버 사의 ‘찬스! 백만장자’에 당첨되어 한 재산을 챙기더니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췄다. 남아메리카 어디쯤에서 흥청거리며 인생을 즐기고 있지 싶다. 그후로 나는 더 이상 가구들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었다. -p.57
이런 문장을 심심찮게 던지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느낌으로 아는 것들. 제목만큼이나 그의 감각들이 여기저기 녹아있다. 그의 감각들로 받아들인 이 세계, 내 뇌까지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문장들. 그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세상은 늘 금요일이 되어버릴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잔뜩 할 수 있는 금요일 저녁으로 일주일이 채워질 것만 같다.
내게 컵은 그저 컵으로만 보이고 의자는 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 속에서 이 작가는 자꾸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아니 그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작가의 호명에 따라 각자 살아서 움직인다. 그에게는 사람뿐 아니라 물건들도 아니 생각들도 모두 형상화되어 캐릭터화 된다. 그렇게 숨을 불어넣는 그의 문장이 나를 자극한다.
가끔은 이런 감각을 지닌 작가들의 눈을 통해 그 머리로 들어가 보고 싶다. 아니 더 욕심을 낸다면 그들의 눈을 뺏어오고 싶다. 그들의 눈에는 뭔가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다시 웃어버린다. 남의 눈을 가져온 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감각들을 즐기고 배워서 나만의 눈을 가지는 일이다. 그들의 문장을 통해 나의 감각들이 죽지 않게 계속해서 이용하는 것들이다. 오늘도 나는 더 말랑말랑한 감각들을 위해 문장들을 먹어치우며 컵이 가지고 있는 세계와 의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느껴보려 애쓴다. 그리고 나만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세계를 문장으로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