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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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는 울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십대의 나에게 눈물은 곧 부끄러움이었고 절대 허락할 수 없는 나약함이었다. 그리고 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동안 울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듯 많이도 울었다. 난 그제야 땅 위에 맨발을 딛었고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서투른 나는 많이도 다쳤다.

  이십대 후반의 나는 여전히 서툴지만 땅의 감촉도, 그 단단한 바닥 아래의 축축한 감촉도 잊지 않는다. 잊지 않고 나를, 나를 둘러 싼 세계를,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또 끌어 안으려 노력한다.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목소리들이 내 귀를 파고든다. 어떤 목소리는 듣는 순간 잊어버리고 어떤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생각해본다. 그 둘 중, 악인은 누구일까? 악인은 존재할까?

  서투른 사람들은 어쩌면 전부 악인이다. 또한 악인이 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있어야 한다. 어렸을 때의 서투름은 대부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스스로를 다치게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상처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치유할 수 있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서투름의 변명을 조금 벗을 수 있다. 그것이 잘 되지 않고 나이가 들었을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스스로를 철장 속에 가두어 버린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 속에 둘러 싸여 살아간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다.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던 소설의 도입부에선 정신을 바짝 차려가며 그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하다. 그러나 소설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너무 자연스럽게 그들의 목소리가 분리되어 들려왔다. 유이치의 목소리, 미쓰요의 목소리, 마스오의 목소리, 후사에의 목소리, 요시노의 목소리, 작가의 문장 속에 그들은 제각각 또렷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붐벼오는 퇴근길의 지하철 속에서 나는 정지했다. 아주 흔하게 보았을 법한 문장을 읽고 나는 머리를 세차게 맞은 듯 멍해진다.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나는 이제 강하다는 게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자신이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꼭 두 눈을 치켜뜨고 주먹을 꼭 쥐어야만 강하다는 게 아니란 걸 안다. 자신을 우선 잘 이해하고 소중히 해야 저절로 강해진다는 것도 안다. 강해진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가진다는 뜻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만은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강해진다는 것도 안다. 그런 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 무릎에 바싹 다가서는 낯선이의 무릎을 보며 멍하니 지하철 노선을 따라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서투르다. 내가 가진 물음표들은 너무 무겁고, 내 속의 거울들은 너무 눈부시다. 내 시야는 자꾸만 반사되어 내 속에만 머문다. 내 속의 물음들은 다 답을 찾지 못해 눈물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기만 한다. 나는 다시 우는 방법을 잊은 것 같다.

 나는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을 잃었기에 동시에 다른 소중한 사람들도 잃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악인이다. 종종 나는 상대방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을 다시는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변명으로 상대방을 악인으로 만들고야 마는 나는 진짜 악인이다. 결국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나는 진짜 악인이다.

  나는 여전히 강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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