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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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해외로밍을 해두지 않아 그간 한 번도 켜보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바깥세상은 바깥에 놔두고 싶었다. 단 한 달만이라도 히말라야가 삶의 전부이기를 바랐다. 실은 해외로밍을 신청하는 법도 몰랐다. 낮잠을 대신할 소일거리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서야 꺼내봤을 것이다. 나는 3000미터 고지에 올라선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두기로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마을처럼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거리와 마을 외곽에 듬성듬성 우거진 침엽수림과 '천국으로 가는 길', 꼭대기 분화구까지 내려다보이는 안나푸르나 2봉...


전원을 눌렀다. 남편의 평가를 빌리면, 대한민국에서 2천명이나 쓸가말까한 퇴물 폰의 작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아들 얼굴이 깔린 바탕화면이 떴다. 동시에 전화벨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전화기를 패대기쳐버릴 뻔했다. 손바닥에 뱀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토록 질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보세요"하며 통화버튼을 누른 건 순전한 본능의 힘이었다.



"택뱁니다. 집에 계세요?"

기운이 쭉 빠진 나머지 목소리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경비실에 놔두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버럭 화가 치밀었다. 손을 벌벌 떨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신사에도 전화 좀 해봐. 나 해외로밍 하지도 않았는데 전화통화가 돼. 이것들이 사람을 봉으로 보나. 요청하지 않은 서비스를 자기들 맘대로..."

남편이 자다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동로밍 됐겠지. 요새는 그래."

남편은 통화가 된 김에 묻는 건데, 별 일 없느냐고 덧붙였다. 대답 대신 '자동로밍'에 대해 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해외로밍을 해두지 않았으니 전화 걸지 말라고 말했을 때, 알려줬어야지. 남편의 답변은 이랬다.

"난 자동로밍이 되지 않게 했다는 말로 들었는데."

"그 택배기사도 좀 이상하잖아. 국제전화인 줄 알았을 거 아냐. 로밍 안내방송 나오잖아. 고객이 집에 있는지 확인하자고 비싼 요금 들여서 국제전화를 건단 말이야?"

"로밍요금은 전화를 받는 사람이 무는 거야. 그것도 몰랐어?"

내가 언제 외국에서 전화를 받아봤어야 알지. 전화를 끊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정유정,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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