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법풍경 #1
내가 아는 형은 사법고시를 패스해 변호사가 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모두 판사나 검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연수원 성적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변호사가 된다고 한다. 형은 법무법인에 들어갔다.
그 형이 변호사가 된 이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있다. 얼마나 바쁜지 밤 11시까지 일할 때도 많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잠을 잘 때도 있다고 한다. 또 주말에도 거의 출근해 일을 한다고 한다.
물론, 월급을 많이 받기는 하겠지만, 전문직이라는 사람들이 저토록 고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조금 적게 받아도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걸까?


사법풍경 #2
회사에 다니다보니 본의 아니게 소송에 말려들어, 회사대 회사로 1년 넘게 소송을 진행중이다. 그런데 우리와 계약한 건 변호사인데, 사건에 관해 전화 통화를 하는 건 거의 변호사가 아닌 사무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지만 그 사람을 통해 변호사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보고 사건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왜 이와 같은 체계가 되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 책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변호사마저 접근하기가 어려워 사무장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검사와 판사는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나 역시 소송일로 변론준비기일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재판장이었던 지방법원 지원장의 포스는 엄청났다. 변호사들조차 재판장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책은 대한민국 사법계의 현실을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담은 책이다. 무언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는 있으나,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런 결과가 발생하는지 모르는 사안에 대하여, 그 숨겨진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스물 세 명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을 통해 저자는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된다.

판검사가 돈을 받는다? 판검사도 청탁을 한다? 와 같은 충격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전반적인 사법 시스템의 모순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팔로역정 부분이다. 파릇파릇한 법조 지망생들을 "원만함"이라는 굴레로 변색시키는 여덟가지 시련과 유혹을 천로역정에 빗대어 저자는 팔로역정이라 부른다.

1번부터 8번까지 책의 팔로역정 부분 중 일부를 발췌해 적었다.

1. 새로운 언어로의 입문, 사법시험

법학은 일종의 '새 언어'를 익히는 과정이었고, 그 언어는 앞으로 평생 그들을 먹여살릴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성가족(법조계)의 일원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판검사, 변호사와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깊이 상처받는 이들입니다. … 일부는 법조 주변에 남아 신성가족의 아우라(aura)를 먹고삽니다.

사법시험을 인간성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의 과정" 이라고 봅니다.


2. 결혼시장의 유혹

남자 법관들이 결혼 '잘한다'는 것은 재력 있는 집안 여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검사, 변호사들은 의사들보다 "여자 집안의 재력 같은 것을 더 많이 계산"합니다.

비록 마담뚜를 통해 배우자를 소개받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은근한 기대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깨지면 실망합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집안 출신의 배우자를 맞은 사람들은, '나는 그런 식으로 돈에 팔린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3. 끝없는 서열경쟁과 관료제의 늪 속에서

판검사도 처음 임관할 때는 희망과 성적에 따라서 임지를 정합니다. 판사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부터 서울중앙지법, 동남북서부 지법, 수원지법, 인천지법 등의 순서로 배치되고, …

판사들 중에서도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군법무관을 마친 남자들"이 최고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 최근 들어 사법 연수원 교수들이 "가장 우수한 애들은 대원외고 나오고 고대 법대 나오고 재학중에 합격해서 들어온 애들"이라고 …


4. 판사는 없고 학동만 있는 양성시스템

도제식 양성제도 아래에서 배석판사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상급심의 판결을 그대로 따라가는 기계적 판결만 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5. '원만함'의 한계와 권위주의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의 경우 "자기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 부장판사들의 경우에는 대운하를 비롯한 법 이외의 사안에 대하여도 "그거는 이거죠"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 원만한 분들이 왜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승진하고 나면, 남들보다 더 권위적인 판사가 되는 걸까요. 저는 이런 현상을 윗분들을 향해 '만들어진 원만함'의 한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독불장군, 유아독존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원만함"도 중요한 평가의 기준임을 깨닫게 됩니다. … 이때부터 천재, 신동들은 "원만함", 특별히 '윗분들을 향한 원만함'의 옷에 자신을 맞춰가기 시작합니다.

6. 살인적인 업무량

1980년 약 26만 건이던 1심 본안사건이 2006년에는 약 160만 건으로 6배가량 증가했고, 사건의 내용도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판사 수는 3.2배가량 증가했을 뿐입니다. … 부장은 전체적인 재판 진행을 위해서 지금 돌아가는 100건이 넘는 사건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 속행 기록을 제대로 안 보면 쟁점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증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도 많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과도한 업무량이 모든 문제의 뿌리


7. 변호사 개업, 작렬하는 포스, 초라한 내면

결국은 모두가 변호사가 된다

브로커와의 결탁, 과다 수임료, 불성실, 노골적 청탁 등 법조계에서 문제되는 사건의 장본인은 의외로 전관 변호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8. 감시자도 삼켜버리는 블랙홀

우리 법조계의 감시자들은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동화되어버린 기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멀리 있어서 내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만 들을 수 있는 시민단체 간사'들입니다.

저자의 팔로역정에서 제기된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돈과 속임수에 얽힌 치팅컬쳐 문화도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이는 문제의 현상이지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저자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바로 '가족 문화'에서 오는 문제로 판단하고 있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울타리 내의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그네들의 소수 독점 의식을 비판한다.

또한 이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판사, 검사, 변호사 각 영역에서 청탁과 '받을 수 없는 돈'이 생겨나고, '원만함'이라는 평판을 위해 윗분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며, 사법계 주변에 있는 사무장과 브로커들은 상대적인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해결책이란 막막해 보인다. 저자는 그래서 '억지로 찾아본 희망' 이라는 마지막 꼭지 제목을 붙였지만 문제의 시작점을 찾는데에서부터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개미보다 작아져야 합니다. 바퀴벌레나 파리조차도 쉽게 바늘구멍을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개미라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불개미 종류나 겨우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지요. … 그러나 이 시험(사법고시)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는 경험은 부작용을 낳게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갑자기 커진 몸은 아무래도 부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사법시험이, 판사·검사·변호사의 인력을 국가에서 시험으로 제약한 것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시험을 통과한 소수의 특권에 의해 그들은 신성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변호사의 인원을 대폭 늘려야한다. 로스쿨은 그 방향에 서야 한다. 변호사의 인력을 대폭 늘리고, 경험이 풍부한 변호사 가운데 판사·검사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늘려야한다.

책 제목이 잘 와닿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고, 부제(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마저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하고 읽는다면,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p.s. 책을 읽고 나서 궁금해 진 것 하나. 과연 이 책을 읽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 '거절할 수 없는 관계'와 '거절할 수 없는 돈', 그 해결을 위해 바늘 구멍을 조금 넓히자는 책의 논지에 동의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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