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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애란 作
9개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_나는 편의점에 간다_스카이 콩콩_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영원한 화자_사랑의 인사_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종이 물고기_노크하지 않는 집
그녀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나는 그녀를 '삶의 세밀화가'라고 부르고 싶다. 편의점에 가는 행위, 잠 못 드는 일, 동창과의 우연한 만남, 하숙 생활 등 일상 생활에 얽힌 미묘한 감정들은 세밀하게 잡아내며 묘사하고 있어, 공감을 이끌어 내는 한 편, 일탈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몇 가지 특징을 잡아 내자면, 아래의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모든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니며, 몇 몇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작품 속의 아버지는 이미 사라졌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사라졌다가 나타나거나, 나타나도 초라한 행색이거나..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무능하고, 초로한 아저씨에 불과했다.
달려라 아비_어느날, 어머니는 임신을 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고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그녀의 아버지는 며칠 전, 어디서 났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이스트팩 하나를 맨 채 그녀 앞에 나타났다. …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상상하던 아버지의 하반신이 그녀가 없는 사이 그곳에서 뿌리째 걸어나갔다는 것 뿐이었다.
사랑의 인사_순간 나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모호한 문장, 먼 곳에서 수백년 전 출발해 이제 막 내 고막 안에 도착하는 휘파람 소리, '아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감추지 않는 성性
작가는 성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감추려하지 않고, 주목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잠이 오지 않아 떠오르기도 하고, 끝없이 말하다 불쑥 나오기도 하고, 회상하다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다.
달려라 아비_그러자 어머니도 아버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 날만은 '평생 이 남자의 하중을 견디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_그러던 내가 패밀리마트에 가지 않게 된 건, 어느날 콘돔 한갑을 계산대 앞에 내민 내게 그녀가 주민등록증을 요구하고 나서부터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도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여차저차해서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도 잊은 채 몸을 맡겼던 것이다.
영원한 화자_"더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 … 한참후 그는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이물고기_삼양라면 한개를 옆구리에 끼고 퇴근하던 그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온 그의 어머니를 보고 놀라 한참을 서 있다가, 말없이 돌아나가 라면 한개를 더 사가지고 돌아오던 날 이후, 그는 그렇게 생떼를 쓰듯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노크하지 않는 집_물론 이곳에도 얼굴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가령 몇번 방 아가씨가 어제 울었다든가, 몇번 방 여자가 세탁기를 쓴 뒤에는 항상 양말 한짝이 남는다든가, 몇번 방 여자는 남자를 자주 들인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 커다란 옷들은 보풀이 일어난 채 건조대에 피로하게 걸쳐져 있었고, 늙은 팬티 앞면엔 하나같이 누르스름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갑자기 '여자에게는 애인이 없다'는 생긱이 들었다.
선언적 시작
한 문단만으로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킨다면? 나머지 문단에 맞먹는 힘을 가진 그녀의 첫 문단. 작가는 간략하며 인상적인 첫 문단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달려라, 아비_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_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영원한 화자_나는 내가 어떤 인가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사람이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바람이 많이 불던 밤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무엇이든 묻고 싶은 밤. 뭐라도 묻지 않으면 누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해올 것만 같은-그날은 그런 바람이 불던 밤이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_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누군가 아버지의 (모래) 성기에 기다란 불꽃 놀이 막대를 꽂는다. 그러곤 그곳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 셋을 외친다. 심지를 타고 조급하게 타들어가는 불꽃이 피유우웅-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펑! 펑! 활짝 피는 불꽃들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거대한 성기에서 나온 불꽃들이 민들레씨처럼 밤하늘로 퍼져나갔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이 고독한 우주로 멀리멀리 방사(放赦)되었을 때. "바로 그때 네가 태어난 거다."
이처럼 탄생비화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말을 듣고 아들은 "거짓말" 이라고 했을 뿐이지만.
김애란,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기대해야겠다. 이 작품이 그녀의 정점이 아니길. 더 많은 무수한 일상 생활을 경험하기를, 그리고 그녀의 세필을 들어 묘사해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