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인물로 읽는 한국사 (김영사) 10
이이화 지음 / 김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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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현재의 모습에서만 바로본다면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날아가는 공의 찰나의 시간을 사진을 붙잡아 놓고, 이 공이 어디로 갈 것인가 묻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멈춰진 공이 아니다. 우리는 프레임 속에 갇힌 사회가 아닌 활동 사진 속에 담긴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이화의 인물로 읽는 한국사 10번째권, 끝나지 않은 역사앞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전후로 활동한 정치가들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피고 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예 무관심으로 북한을 대하는 오늘의 시대에 북한의 최초 권력자 김일성에 대해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사실적으로 쓴 책을 만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박정희나 이승만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에 대해서는 아는 게 이름 외에는 거의 없었고, 신익회, 조병옥, 조봉암, 장면, 김두봉, 허헌, 백남운은 아예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이승만에 대해 느낀 감정을 옮겨보자면,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터무니없는 헛소리이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큰형이었던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다. 무너진 조선왕조를 대신해 세워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조(이성계)-태종(이방원)-양녕대군을 잇는 그 후손이 첫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승만의 출세는 영어실력과 미국에서 받은 박사학위로 요약된다.

이승만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강연이나 기고 또는 기자의 인터뷰에서 "조선이 병합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거나 "나는 조선 안에서나 하와이에서나 혁명을 획책할 생각은 없다"는 말을 하면서 일본과 무력투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토로했다.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을 지낸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말을 신문에 실었다가, 공립협회 회원 장인환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그런데 장인환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부탁하자, 이승만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 없다"고 거절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3.1운동 후 서재필, 이승만 등은 이해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인 대표자대회를 열고 한국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민주국가의 수립을 다짐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미국 외교가를 누볐다. 이에 안창호가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이니 임시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는 전보를 보냈고,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떠들지 마시오"라는 회진을 보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일로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내분에 휩쓸렸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함꼐 일할 수 없다 하여 처음부터 참여를 거부했고, 이동휘, 신채호 등은 이승만이 위임통치론을 주장한 인물이라 하여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이완용은 존재하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었으니,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매도했다.

1934년 서양 여인과의 재혼. 당시 이승만은 59세,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1945년 10월 12일,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으로 김구 등 중국의 임시정부 일행보다 한 발 앞서 귀국했다. … 그는 동경에서 맥아더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 때 맥아더는 이승만의 반공, 반소 노선을 확인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절대적 신임을 보였으며 사실상 한국 대통령 자리를 보장받았다. …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 곧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원봉 등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유엔의 감시 아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물론 북한이 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마당에서 이를 적극 지지했고, 김일성의 제안으로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하나의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도 비난하고 나섰다. …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가 차례로 암살되었다. 그 진상은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외쳤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승만은 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고 방송을 하고 자신은 대전으로, 부산으로 허겁지겁 피난을 떠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연합군(미군)에게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다. 이 군사권의 포기는 자주국가가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에서는 이승만을 두고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병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는 아첨꾼이나 친일파들을 고위직에 등용했다. 신성모는 공식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도 큰절을 올리면서 말끝마다 눈물을 뚝뚝 흐렸다. 그래서 그를 두고 낙루장관이라 불렀다. 최인규는 이승만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지당하십니다"를 연발하여 지당장관이라 불렀다. 이익흥은 이승만이 방귀를 끼자 "시워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해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의 발발을 계기로 탄생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 윤치영은 경찰이 영장 없이 반란군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고, … 1948년 11월 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 끝내 이해 11월 20일 통과되었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 표결. 표결 결과, 제적 203명, 재석 202명인데, 가표가 135표. 최순주 부의장은 3분의 2에 1표가 부족하다고 해서 부결에 방망이를 때렸다. … (그 결과를 듣고) 이승만은 미리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대꾸했다. "이 사람들아, 통과된 것이야. 사사오입해야 하지 않나!" 곧 203의 3분의 2는 135.333 인데, 이를 반올림하면 135명이므로 통과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개헌 후 선거에서) 정치깡패들이 난동을 부렸고, 반이승만 언론인 경향신문을 폐간시켰고, 조봉암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형을 집행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의 지지표가 95~99퍼센트에 이르렀다. 부정선거를 지휘한 자들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계표에 당황했다 한다. 최인규는 이승만 88.7퍼센트, 이기붕 79퍼센트로 조정해 발표했다.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이이화》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하야한 후,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90세의 나이에 죽었다.

과연, 민주주의의 절차를 훼손하고 권력에 눈이 먼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이승만을 국부로 하는 건국 60주년을 전면에 내세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왜곡하는 처사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뉴라이트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 김구는 남북협상을 추구한 건국의 방해자, 친일파와 일본은 식민지 근대화의 공헌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승만을 옹호하여 친일파, 지주세력을 등장시키고 남북협상파, 독립투쟁세력을 역사의 대열에서 패기 처분하기 위함이라고 역사학자 이이화는 주장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도 이이화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은 그의 독재와 구분되어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경제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그의 독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면에서 오직 경제만 믿고, 도덕성 제로의 MB를 뽑은 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이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 이룬 업적에 대해, 훗날 그의 업적을 보며, 그걸 누가 못해 하고 평가 절하하기는 쉽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박정희 정권이 군부 독재를 시작할 때, 한국 경제을 성장시킬거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MB역시 경제만 믿고 뽑은 대통령이지만, 한국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즉, 박정희 정권의 시작은 경제를 담보에 건 독재가 아니라, 경제를 생각하기 이전 권력욕에 눈이 먼 독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은 독재의 결과가 아니라, 경제 정책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허헌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법률가로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독립운동을 몸소 실천한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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