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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현상 -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이금이 고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오승민 그림 / 밤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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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게 어쩔 줄 모르며 손이 떨리는 그 현상? 어린이에게 '금단현상'이 올만한 간절한 것이 뭘까? 어린이의 마음을 가늠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멀어진건지, 저 어휘에 부합될만한 소재로 고작 흡연 외엔 짐작되는 게 없었다. 호기심 듬뿍 묻은 책을 바로 짐가방에 넣었다. 강원도 부모님댁을 향해 달리는 차 안 보조석에 앉아, 쉬엄쉬엄 차창 밖 산등성이 풍경과 책 속 소년소녀들의 내밀한 마음에 번갈아 눈을 옮겼다. 어느덧 열두세살의 내가 되어 있었다. '금단현상 돋고도 남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금단현상』은 이금이 작가님의 동화 다섯 편(<꽃이 진 자리> <한판 붙어 볼래?> <금단현상> <십자수> <임시보호>)이 담긴 동화집(2021년 개정판/2006년 초판)이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모두 도시에서 살아간다. 엄연한 사회구성원데도 어쩐지 안식처가 없어 배회하거나 입술을 불퉁히 내밀고 웅크려있는 모습이다. 낡기만 한 빈 집을 뒤로 하고 벚나무 한 그루에게 위로 받거나["벚꽃 등 아래에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9p)], 피시방에서 시간을 잊고 게임에 몰두하거나["새 학교의 아이들은 날 촌놈이라고 놀리며 자기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33p)"], 부모의 전폭적 교육 지원을 받아온 하은조차도 유기견보호소에서 푸들 강아지가 오기만을 목빼고 기다리며["포포가 오면 집에 혼자 있어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98p)"] 말이다.


아이들의 결핍된 마음에 따뜻한 활기와 희망이 들어서는 계기는,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관계는 아이들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로 이뤄진다. 심지어 그 노하우를 어른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아빠가 팔찌를 만들면서 엄마가 화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93p)"]. 소녀가 할머니의 집으로 스스로 직접 찾아가보지 않았다면(<꽃이 진 자리>), '촌놈' 최영훈이가 '떡장수' 이장수에게 반격하고, 또 실수로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더라면(<한판 붙어 볼래?>), 소원해진 친구 유나가 말을 걸며 다가왔을 때 하은이가 닫힌 마음을 끝까지 열지 않았더라면(<임시보호>) 어땠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차가운 담이 사소한 계기로 와륵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 보아도 찡하다. '훈훈하다'고 표현하기엔 아쉬울만큼 뭉클하다. 이금이 작가님의 동화를 읽으면, 어른 눈에는 미숙하게만 보이는 어린이들이 작은 반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다시 알게 된다. 내 어린시절을 까먹고 살아가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동화집 제목과 같은 세번째 동화 <금단현상>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 왜 내가 이 나이먹고 같이 두근거리고, 궁금해죽겠냔 말이지. 라떼는 휴대전화가 대학교1학년이 되어서야 보편화되고 SNS도 없던 시절이니, 초중고시절에는 집전화나 공중전화로 마음 졸이며 통화를 하곤 했다. 짝사랑하는 남자애 집에 전화해서 목소리만 듣고 끊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삐삐사서함에 익명으로 음악을 남기는 짓을 했던 것도 같다(아아 소름!). 그래서 현기의 답장과 성규의 전화를 다시 기다리는 동안 겪는 효은이의 '금단현상'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효은이가 하진에게 피구공을 던지게 되기까지, 그 순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은 정말 최고다. "마음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처음엔 그것이 불길처럼 타오르다 연기처럼 흩날리고 말 질투 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뜨거운 무엇인가는 점점 단단해지더니 마음 한가운데 기둥처럼 곧추섰다. 그 기둥이 마음을 받쳐 주는 것 같았다(69p)'불의에 대한 반감'은 치기어린 시샘과는 분명히 다르다. 옳은 행동을 선택한 그 순간은 어른인 내가 봐도 통괘하고 멋졌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이 문장을 보고, 다시 실감한다. 나를 성장하게 하는 동력은, 나를 지지하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도. "오늘 하진이에게 했던 행동은 충동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보다 성규와 통화하며 차곡차곡 쌓았던 다짐 덕분에 나온 것이었다. 오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72p)"


<임시보호>에서 하은이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헌신을 다한다. 하지만 정작 하은이는 외롭고 버겁다.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게 솔직히 걱정스럽기보다 두려웠다. 내가 공부를 못해도,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걸 이루지 못해도 나를 사랑해 줄까.(120p)"] . 하지만 하은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분위기로 전환되는 점이 참 다행스러웠다. ["부모역할은 자식을 임시 보호하는 거지, 애 인생을 평생 책임져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123p)"] . 부모님이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네가 바라는 것을 알려달라고 해봤자, 하은이는 결코 본심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고통'도 금단현상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금단현상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혼자서 극복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효은이가 차곡차곡 '말할 수 있는 힘'을 쌓아갔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귀가 탁 트여 있어야만 한다. 진구가 내달리는 벌판의 풍경이 그 이치를 말해주는 것 같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동영상 속에서 진구는

목줄도 입마개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사이를 달려가고 있었다.

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신나게 달렸다

<임시보호> 중 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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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 이 시대를 사는 40대 여성들을 위한 위로 공감 에세이
한혜진 지음 / 체인지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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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상> 소설에 대한 추천사에서 정혜윤 작가님이 이런 표현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이하 마앓나알)>를 읽으며, 자꾸 눈을 꾸욱 감고 잠시 멈추어서곤 했다. 전화를 끊고 봇짐처럼 뒤에 아기를 업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서. 이제 손아귀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된 몸뚱이라, 식당 설거지 알바조차 못할 거라는 위기감으로 덜컥 겁이 났던 내 설움도 떠올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며 경력을 쌓았고, 인정과 경제적 자립을 누리며 살아왔어도 소용이 없다. 안에서는 궤도에서 이탈된 무력감에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자존감이 위태롭기만 한데, 밖에서 찌르는 가시에 더욱 아프다. 싫든 좋든 엄마의 외피를 쓰고 속절없이 나이들어가는 여성의 삶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여성작가가 쓴, 더 정확히는 '대한민국 엄마인 작가'가 쓴 '여자의 마흔 책'이 나왔다. 목이 빠질 뻔 했다. 왜 이제야 나왔냐고 엄한 작가님에게 징징댈 뻔 했다. 실은 재작년 겨울 나는 마흔을 앞두고, 마음의 의식 차원(?)에서 마흔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한 권 읽어보았지만, 해갈되지 않는 허기가 남았었다. 책에는 내 삶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나를 위한 지침으로 깊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나는 여전히 고막이 찢어지게 악을 쓰는 꼬맹이를 폭풍육아 중이었기에, 내 나이를 셈할 여력보다는 내 자식 개월수를 셈하느라 절박했다.

나의 ' 마흔앓이'는 일년이 지나 마흔 한살을 코앞에 두었을 때, 잠복기를 깨고 실체를 드러냈다. 11개월 간격으로 무려 두번의 지독한 독감과 후유증으로 생전 모르던 식도염까지 앓으면서 나는 땅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아둥바둥 더 살아가야할 날도 벌써 지긋지긋해서 이대로 증발해도 미련이 없을 것만 같았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한 두번 아파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유난히 우울해 죽을 것만 같지. 나중에야 '명료한 언어'를 통해 깨달았다. 그동안 깡으로 자만했던 내 몸도 이제 더는 '청춘'이 아니구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직시하고서야 말이다.

"'나이 든다'는 그 느낌을 자세히 말해보자면,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일정 기간에 이르러서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순간이 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비교가 될 정도로 나이가 든 느낌이 든다(21p)"

<마앓나알>에는 노산후유증이 노화와 조우했을 때, 삶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머뭇거리지 않고는 하기 힘들었을 고백까지 솔직하게 담겨 있다(케이트 윈슬렛 진짜 감사하고 멋지네요. 저도 사랑해도 될까요?). 나 역시 작가님과 유사한 고충은 물론, 더는 족집게 뽑기로 따라갈 수가 없는 흰 머리 자괴감, 비비크림을 발라도 푸석하기만 한 피부, 상냥한 눈웃음보다 더 먼저 눈에 띄는 눈주름, 만성으로 시큰거리는 손목, 어깨죽지마저 어긋난 것 같은 통증, 아랫니가 점점 비뚤게 돌아가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충격, 세상 모르고 살았던 두통의 빈번함까지.. 모든 노화가 아주 신나게 현재진행형 중이다. 이 모든 게 정말 마흔을 기점으로 심화되었다. 그야말로 인체의 신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노화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나도 그래요. "나도 그래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게 해준다.

하루 차이로 새해가 왔을 뿐인데 마흔이라고 유별나겠나 싶지만, 이 정의를 대입해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흔이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수가 비슷해지는 나이(4p), 무엇을 하기에도, 멈추기에도 애매한 나이(6p)" 정말 그렇다. 이십대에서 삼심대로 넘어가는 것과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아무리 말이야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마흔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지는 분기점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아. 당혹감을 분명 느끼면서도, 하루하루 육아와 가사 과업을 완수하느라 막상 진지하게 현 시점에 대해 사유해볼 기회를 갖지 못해왔다. 그런데, 책이 내게로 왔다.

마흔이 되고 보니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나이와 노화뿐인 것 같다.

일부러 살아야 한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78p 중에서-

한혜진 작가님은 그동안 자신의 내면아이를 보듬으며 쏟아낸 눈물들을 거두어, 또 다른 마흔들에게 씨앗을 건넨다. 자기학대, 자기비하, 자기혐오의 고통에서도 끝내 생존해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글을 쓰면서도 울고,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도 울고, 책을 내고서도 떨고 있는 작가님.. 그런 그이기에, 그가 전하는 '일부러 살기' 미션이 겸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일부러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다름아닌 '가장 나다움'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부정확하게 규정한다(87p)"는 말이 참 와닿았다. 여자라서, 엄마라서 씌어진 잘못된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정의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 불혹은 무슨, 마흔은 흔들릴 일투성이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내공 기르기에 열중해야 한다(18p)고 알려주었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일부러 살아야만 쌓을 수 있는 내공 말이다. 나는 이제사 좀 앞으로 보람있고 즐겁게 임할 수 있을 나다운 평생업을 탐구해가고 있는 터라, 이 문장을 믿고 계속 용기내어 나아가고 싶다. "엄마의 일은 내가 눈높이를 낮춘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로또처럼 한방에 인생역전하듯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남을 따라서 한다고 그 사람처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나를 제대로 알면 일이 생긴다.(112p)"

보통 마흔무렵의 엄마는 사춘기에 진입하는 자식을 양육하는 시기다. 내 아이는 이제 다섯살인 마당이라 당장 시급하진 않지만, 5년 뒤면 반드시 닥칠 일이다. 한혜진 작가님은 양육서 베스트셀러인 <극한육아 상담소>, <무조건 엄마편>, <위대한 유산>을 집필하신 분 답게 특유의 명민한 통찰이 이번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점점 떠나가는 큰 딸아이를 바라보는 변함없는 사랑과 마음의 준비, 중심을 단단히 세우는 양육철학은 작가님의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함께 지혜로운 엄마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공언이다. 나는 청소년은 무조건 반드시 기필코 "반항하는 망나니"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두려웠는데, "아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가진 일부 행동이나 성격, 습관 같은 것이 문제(194p)"임을 깨닫고 "인간 존재로서 10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195p)"는 참지식을 얻었다. 인용된 기질 영어 전문가 김세희 님의 이야기에도 눈이 번쩍 뜨였다. "밖에 나가는 것만이 경험이 아니예요. 소통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느냐가 진짜 아이의 경험이죠. 아이와의 대화가 어디까지 쭉쭉 뻗어 갈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201p)"

내가 필요로 했던 실질적인 마흔 책,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를 읽으면서, 딱 이 생각이 든다. 같이 늙어가는 언니가 있어서 너무 좋다. 같이 늙어가는 마흔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마흔의 고비를 넘어선 내가 좋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해주는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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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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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님이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긴 제목을 줄여, '우우우부'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나는 드디어 책을 배송받고 조심스럽게 펼쳐 몇 쪽 읽지도 못하고서는 깨달았다. 우우우으..부들부들.... 거려서 우우우부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겨레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고, 국민일보 기사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그 지옥같은 곳을 모니터링 해오고, 피해자에게도 알려 도와준 이들이 있다는 게, 정말 놀랍고 울컥스러웠다. 바로 N번방 최초 보도자이자 최초 신고자, 추적단 불꽃. 그들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책으로 역사를 아카이빙하고, 이 사회에 주어진 책임과 과제를 결연히 발언한다. 저널리스트를 넘어 '아웃리처'로 나아간 그들의 용기는 어떤 기립박수로도 모자랄 것이다.


N번방 사건은, 여성, 아동청소년을 협박, 인권을 유린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 '감금'하여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판매)'하고, '구매(범죄방조&공조)'한 범죄다. 단순히 몇 명이서 저들끼리 사적인 채팅방에서 키득거리며 성적 농담을 주고 받은 게 아니라, 수.천.명.이. 실.시.간.으.로. 그 범죄현장을 매일같이 공유한 것이다. 나는 이 사건내막을 접했을 때, 친오빠에게 톡을 보내 '설마 텔레그램 하는 건 아니겠지?'고 물을 정도로 측근 남자들이 다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웠다. 길을 걸어다니는 멀쩡하게 생긴 남자를 봐도, '혹시 저 사람도?' 싶다. 그래서, 더 말할 것도 없이 추적단 불꽃이 겪었을 고통과 트라우마가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책 중간에는 취업 준비로 학업과 대외활동에 여념이 없는 대학생이던 '불'과 '단'이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어간 과정이 에세이로 담겨 있다. 세상이 조금은 나아졌으리라는 예상이 무참하게, 이제 20대인 그들이 여성으로서 겪어온 일상은 내가 알고 겪던 일들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고등학교 교사가 여학생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는 미친 지경인데, 뭘 기대하랴!!!)

추적단 불꽃이 피운 불씨로, 디지털 성범죄의 실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심각성이 인지되고 있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참담하게도,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추적단 불꽃은 자신들의 성과와 공헌에 초첨이 맞춰지는 것이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이 뭐였어요?'라는 질문이 아닌, "'지금 피해자의 일상은 어떤지, 피해자 보호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필요한 입법은 무엇인지, 재판부의 솜방망이 판결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187p)"와 같은 관심을 원한다. 성숙하고 현명한 그들에게 머리가 숙여진다.

추적단 불꽃을 비롯한 존경스러운 많은 활동가들이 목표로 하고, 나 역시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디지털 성범죄 '문화' 해체(75p)다. '문화'라는 키워드는 굉장히 중요하고 핵심적이다. 처벌수위를 훨씬 강화하고 피해자 지원을 확대하는 실질적인 방안보다 더 어렵긴 해도, 오히려 누구나 지금 당장 가장 해볼만한 노력이 아닐까?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거나 '피해자스러움'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선정적 여론에 휩쓸리지 않는 일, "피해자의 삶을 피해 사실 하나로 재단하지 않고 개인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일(249p)", 나와 내 주변은 물론, 내 아이의 성인지 감수성을 키워주는 일, 성희롱 문화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용납하지 않는 일 등.

나는 지금도 드라마 "동백꽃 필무렵" 마지막회에서 음흉한 미소로 비웃는 흥식의 대사가 몸서리쳐진다. "까불이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계속 나올꺼야.." 하지만, 이를 받아치는 용식의 대사에 여전히 눈물이 날 것 같다. "니들이 많을 것 같냐? 우리가 많을 것 같냐? 나쁜 놈은 백 중에 하나라서 쭉정이지만 착한 놈은 끝없이 백업돼. 떼샷이라고."

추적단 불꽃의 진심은 순수하고 단순했다. 지극히 인간다웠던 것. 미안하고, 감사하고, 지지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보낸다.

우리가 당장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34p 중-






* 해당도서를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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