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는 소희와 바우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의없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집요하게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예의. 보여지는 것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예의. 이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익숙해지는 능력 같다. 그 연습 자체가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소희와 바우가 미르를 이해했다면, 나는 책을 읽으며 소희를 이해한다. 나의 성정(성질과 심정)은 소희보다는 미르 쪽에 가깝다. 소희가 단 한번도 미르처럼 주저앉아 울음이 터트려본 적 없으며, '결손'의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성실한 모범생처럼 지냈다는 이야기에 먹먹해졌다. 부모에 대한 원망조차 없고, 미르나 바우가 엄마아빠를 그리워하고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게 차라리 부러운 이유를 깨닫는 순간엔 [(용서할 수 없는 건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121p)],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희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자신이 말할 대상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바우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희가 진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러기 힘들다고. 소희가 당당한 건,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소희에겐 소중한 할머니와 가족처럼 도와주는 이웃어른들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느티나무같은 존재들이 있을 때만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이제 바우와 미르는 어떨까? 바우와 미르에게는 친구가 있다. 바우는 미르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타박당하고 있는 걸 목격했던 순간엔 너무 말을 하고 싶었다. 아빠가 미르의 엄마를 좋아한다고 짐작했을 땐, 감정에 완전히 충실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미르에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바우는 자신의 의지를 믿을수록 점점 말이 필요한 순간을 외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우가 엄마에게 쓰던 편지도 언젠가는 자신을 향하게 될 날도 그려진다. 미르는 엄마가 자신을 더이상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 게 좋았다. 엄마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지켜보면서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미르는 엄마를 미워하고 반항하는 데 쓸 에너지를 이제 자신과 대화하는 데 써 가겠지?
땅만 내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꽃,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하늘말나리들이 어딘가에서 고고하게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느티나무가 가르쳐주는 지혜를 터득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