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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 Stock출판사와 현대출판기록연구소 IMEC가 공동으로 간행했던 알튀세르의 불어판 유고집 가운데 하나가 Verso에서 영역 출간되었다. 『루이 알튀세르, 인간주의 논쟁과 다른 글들』 Louis Althusser, The Humanist Controversy and Other Writings(verso, 2003)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인간주의’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1966-67년 사이에 쓰인 알튀세르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영역자인 고슈가리앙 G.M. Goshgarian이 붙인 서문과 여섯 편의 글들로 채워져 있다. 이 가운데 두 편의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튀세르 사후에 발견된 그의 미발표 문헌들 가운데 추려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에는 글들이 쓰인 혹은 편집된 경위나 과정 등에 관한 불어본의 엮은이인 프랑스와 마트롱 F. Matheron의 짧은 해제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첫 번째 글인 「철학적 정세와 맑스주의 이론 연구」는 같은 제목의 서로 다른 두 개의 판본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는 미완성의 글이며, 이 책에 실린 다른 하나는 1966년 6월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강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마트롱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이 강연 글은 두 가지 목적을 두고 행해졌는데, 그 하나는 자신의 저작인『맑스를 위하여』와『자본을 읽자』가 출간된 이후의 이론적 정세에 대한 평가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의 이론적 연구를 진행하는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두 번째 글 「레비스트로스에 대하여」의 경우는 엠마누엘 테레 E. Terray에게 보내진 편지에 동봉된 듯하며, 알튀세르는 테레의 책 『맑스주의와 원시사회』 Le Marxisme devant les societes primitives의 부록에 실린, 자신의 텍스트에 관한 테레이의 코멘트에 대해 알랭 바디우에게 견해를 묻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디우의 답장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글 「담론에 관한 세 개의 노트」는 알튀세르가 철학적 및 인식론적 문제에 있어서 개별 분과학문 간의 분리와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그 바탕에 놓고 쓴 글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이론적 연구 그룹 Theoretical Work Group'이라는 것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를 철학 및 인문학에 있어서 분과 학문적 차원이 아니라 ‘이론적 대상’, 즉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하려 했다. 따라서 이 글은 그의 이같은 시도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또한 마트롱은 이 글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알튀세르가 일반적으로 체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입증하려 했다는 비난과는 정반대로, 구조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에 있어서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포함된 이론의 독자성에 주목하고, 인문학 가운데 어느 하나의 헤게모니 아래 이를 통합하려는 경향을 조심스럽게 피하려한 사유의 유형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알튀세르가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로 이 글 속에서 제기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1967년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세미나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행한 강의는 사실상 그가 1960년에 포이에르바하의 저작들을 <철학적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에삐메떼 Epimethee 총서로 불어 번역 출간했던 것과 긴밀히 관련된다. 즉『독일 이데올로기』강의는 그가 포이에르바하를 번역하면서 분석했던 초기 연구들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미나의 개략적인 틀을 ‘포이에르바하의 철학’, ‘맑스의 「1844년 초고」의 근본적인 이론적 원리에 관한 논평’,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에 관한 논평’,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평’ 등 네 개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그러나 알튀세르 사후에 정리된 이 세미나 관련 문헌들 가운데 오직 한 주제만이 완성된 형태로 발견되어졌다. 이는 알튀세르의『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세미나의 맨 처음 부분에 해당되는 텍스트로서, 이 책의 네 번째 글인 「포이에르바하에 관하여」이다.
다섯 번째 글 「맑스주의 철학의 역사적 임무」가 쓰인 1967년은 세계 역사상 첫 번째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러시아혁명 50주년과 맑스의 『자본』1권의 발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적인 해였다. 알튀세르는 세계 역사의 경로를 바꾼 위대한 두 혁명, 즉 ‘정치적 혁명’과 ‘이론적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맑스주의 이론의 현재 상황과 난제들, 그리고 그 임무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이 글을 통해 제안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실상 이 글은 많은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1968년 헝가리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제외하고는 알튀세르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마트롱에 따르면, 이 글은 알튀세르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하던 1967년 4월, 소련의 철학 관련 저널인 《철학의 문제》Voprosy filosofi로부터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원고를 요청받아 썼던 것이다. 이때 당시 알튀세르는 이 글을 소련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글의 수정 검토 과정에서 새로운 결론, ’철학과 정치‘를 추가시키면서, 이미『맑스를 위하여』와『’자본‘을 읽자』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철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한편, 철학은 이론의 ‘이론’(대문자)이 아니라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을 대변하는 정치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그의 글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결론 부분이 축소되고 재번역되는 등 검열되었고, 결국 알튀세르는 이 글의 소련 내의 출판을 거절하게 되었다. 또한 <이론> 총서의 시리즈로 예정된 프랑스 국내에서의 출간 또한 알튀세르가 이 ‘역사적 임무’에서 제안된 철학의 새로운 정의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무산되었다.
마지막 글인 「인간주의 논쟁」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은 두 개의 판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레닌과 철학』(영역판 『몽테스키외, 루소, 맑스: 철학과 역사』)에 수록된 바 있으며, 이 책에 실린 글은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된 두 번째 판본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서문은 서로 다른 내용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이 글의 진짜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앞부분이며, 이 부분만이 이 책에 포함되었지만, 편집에서 생략된 서문의 뒷부분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거기에는 알튀세르가 계획했던 또 다른 책의 출판과 관련된 글들에 대한 그의 짧은 언급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이 「인간주의 논쟁」이라는 글을 포함하여, 이미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맑스주의와 인간주의」, 「현실적 인간주의에 대한 보충노트」와 더불어 두 글에서 발단이 된 논쟁과 관련된 다른 글들을 묶어 <인간주의의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발표하려고 계획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늘날 그의 유작의 형태로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쓸(쓴) 당시의 알튀세르는 이미 1965년에 『맑스를 위하여』와『자본을 읽자』를 연달아 출판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맑스의 이론적 독해방식을 세상에 알린 후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는 맑스주의 이론 논쟁의 쟁점에 서게 되었으며, 그의 이론적 입지가 거의 절정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의 인간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인간주의 비판을 통해 이미 당과 치열한 이론적 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이는 이후 당 내부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투쟁의 양상으로까지 번져나갔다. 그 결과 알튀세르는 당에서 제명되는, 그의 말에 따르면 ‘당 없는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이 시기에 철학과 이론, 그리고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개념적 정의를 시도했다. 그는 레닌의 입을 빌어 모든 것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과 정치의 관계라는 이중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1965년의 두 저작을 통해 철학이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라고 정의된 것과, 이후 이 정의가 개념화 자체의 오류이며 실증주의적 이론의 효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정식화라는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이 새로운 철학적 개념은 계급투쟁을 대변하는 이론적 영역에서의 개입의 정치적 실천이며, 과학성을 대변하는 정치 영역에서 개입의 정치적 실천이고, 다른 심급들을 대변하는 본원적 심급으로 재정의된다.
그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썼을 때는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러나 가장 원기 왕성했던 때의 그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눈가 밑에 굵은 주름이 박힌, 그리고 쾡하니 신경질적인 눈매를 갖은 노년의 모습만이 무척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느 알튀세르의 저작과는 다르게 이번 역서의 이미지는 그의 엘렌느가 잘 생겼다고 감탄한 젊은 이마와 눈 감은 평온이 돋보이는 알튀세르의 모습을 담고 있다. 게다가 그는 카푸치노 한 잔을 앞에 놓고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다. 맑스주의 이론의 전화와 전복을 평생 일 삼다가, 자신을 처절하게 분석하며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철학자에게 이런 표정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마냥 생경스러운 것은 어쩌지 못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