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헤어졌다. 아쉬움 따윈 하나도 담아 두지 않고 그렇게.

고요한 밤. 정적 속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거친 엔진 소리를 듣자마자 이욱찬의 ‘오도바이’를 떠올렸다.

나는 그 익숙한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덜 춥다. 말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나도 졸렸다.

우리는 각자의 손에 창을 들고, 어깨엔 무거운 방패를 빙자한 가방을 메고 전쟁터로 출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쩌면 나와의 식사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표면상의 가족. 깊은 대화 따윈 없다.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자동차가 떠난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겨울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몸을 감쌌다

겨울밤은 마치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다. 사납고 음습했다. 연말의 따스한 온기도, 결국은 빛으로 추위를 가려낸 것뿐이었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괜히 눈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냥 실망은 괜찮지만, 기대에서 변질된 실망은 나를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고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른 후,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는 그곳에서 무서울 만큼 쓸쓸하고 고독한 뒷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희뿌연 연기는 곡선을 그리다 흐려졌다.

그래서 묻는 척 따지고 싶었다. 왜 나에게 아침에 기다리라고 말한 건지. 잊고 있던 건지. 왜 이제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태생이 그런 속 좋은 녀석은 되지 못했다.
아, 찌질해…. 나는 너무나도 찌질한 인간이다.

지가 늦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나는 아예 뒷전으로 밀어 놓고 할 일 다 하고, 놀 거 다 처놀다가 늦어 놓고선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겨울,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죽은 나뭇잎 같았다. 바삭하고 손으로 한 번 문지르면 다 부서지고 말 나뭇잎. 그게 바로 나였다.

"나 신경 쓰고 싶어. 때리고 맞는 게 정상적인 친구는 아니잖아. 아무리 네 친구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제 속상하다고 울고, 화난다고 버럭버럭 화내도 되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니까. 열일곱 살 때처럼 마냥 감정을 표출할 순 없었다.

사실은 나도 직설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는 인간 두 명이 모두 돌려 말하는 편이면 괜히 이상해진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는 대신 이불을 움켜잡았다. 부릅뜬 눈이 천장을 겨냥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순식간에 공기가 뒤바뀌었다. 뒤바뀌다 못해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쪼그라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마어마한 준비 끝에야 간신히 했다. 정작 말하고 나니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사실은 맥이 풀렸다.

모르는 척으로 일관한 나로 인해 우리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짝 선 긴장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인정한 것과 타인에게 인정한 나를 드러내는 건 달랐다.

나는 정현우를 재단기 위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칼을 휘둘렀다. 정현우가 나에게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의 세계에선 모든 사람이 그래도 돼,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따위의 긍정적인 응원이라도 해 줬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응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

나는 옅은 곰팡내가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결국 연민에 빠져 버렸다. 그래도 되는 세계가 있다. 안 되는 세계가 있고.

다시 돌아온 현실, 악을 앞에 두고 똘똘 뭉쳤던 영웅 무리는 이미 다 흩어진 후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가졌던 유대감은 평화로운 현실 앞에서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새 학기에 같은 반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그러하듯이 한 해만 유독 잘 지냈던 친구 사이, 반이 갈라지면서 사이도 소원해진 그저 그랬던 관계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설 수 있었던 거고. 그런데 나는 내가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까지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울고 싶었다. 분명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울했다. 얼핏 들은 정현우의 가정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모가 그에게 건넨 내 험담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쉽게 꺼내지 못할 비밀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할 거다.

나에게 사춘기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에 빠진 것과 같았다.

이욱찬은 좋게 말하자면 배포가 컸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달이나 양아치의 낌새를 그때부터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외로워.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앞뒤로 걸었다가 한 바퀴 돌았다.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 같았다. 그만큼 고결하거나 우아하진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나이 미상에, 누가 봐도 양아치 무리인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게 버겁기도 했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우울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 혼자 그 촌스러운, 붉은 꽃들이 수를 놓은 모텔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횟집 옆 편의점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지나치게 험난했다. 술로 슬픔과 우울함을 잊는 사람들은 무슨 수로 잊는 걸까.

모든 걸 잊자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나는 어젯밤 그 일이 혹시 내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는 전날 밤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이성이 또렷해질수록 더더욱.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에 후회를 실어 보내기로 했다. 밀려들었다 꺼지는 파도에 함께 내 마음을 보내기로 했다. 그게 맞다.

여행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끝나는 거구나. 여행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허무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기억이 공유되는 아래에서 그런다고?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작 입맞춤, 이게 뭐라고 모든 풍파를 다 겪는 것 같은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 한단 말인가.

성급하고, 조급하고, 다급한 녀석들이 우리를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영화 같았다. 나랑 정현우는 그냥 걷는 건데 주변만 빠르게 흘러갔다.

날 대할 때처럼 어색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날 새벽을 끝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났나 보다.

겉만 얼고 속은 액체 상태인 얼음. 그것이 우리 가족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엉뚱한 질문과 답만 늘어놓았다. 늦은 밤 켜 놓은 가로등 주변에 꼬인 날벌레처럼 주변만 빙빙 돌았다.

자존심을 세우지 말 걸 그랬나. 이게 아닌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평생을 괴로워할 줄 알았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죽기 직전에 피 토하듯 말을 쏟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그는 내가 오자마자 왜 장난을 쳤으며, 모르는 척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내심 티 내고 있던 걸까.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말라고.

어두운 방, 그의 주변엔 어둠뿐이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덩치로 인해 더 짙고 깊은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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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헤어졌다. 아쉬움 따윈 하나도 담아 두지 않고 그렇게.

고요한 밤. 정적 속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거친 엔진 소리를 듣자마자 이욱찬의 ‘오도바이’를 떠올렸다.

나는 그 익숙한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덜 춥다. 말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나도 졸렸다.

우리는 각자의 손에 창을 들고, 어깨엔 무거운 방패를 빙자한 가방을 메고 전쟁터로 출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쩌면 나와의 식사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표면상의 가족. 깊은 대화 따윈 없다.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자동차가 떠난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겨울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몸을 감쌌다

겨울밤은 마치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다. 사납고 음습했다. 연말의 따스한 온기도, 결국은 빛으로 추위를 가려낸 것뿐이었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괜히 눈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냥 실망은 괜찮지만, 기대에서 변질된 실망은 나를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고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른 후,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는 그곳에서 무서울 만큼 쓸쓸하고 고독한 뒷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희뿌연 연기는 곡선을 그리다 흐려졌다.

그래서 묻는 척 따지고 싶었다. 왜 나에게 아침에 기다리라고 말한 건지. 잊고 있던 건지. 왜 이제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태생이 그런 속 좋은 녀석은 되지 못했다.
아, 찌질해…. 나는 너무나도 찌질한 인간이다.

지가 늦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나는 아예 뒷전으로 밀어 놓고 할 일 다 하고, 놀 거 다 처놀다가 늦어 놓고선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겨울,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죽은 나뭇잎 같았다. 바삭하고 손으로 한 번 문지르면 다 부서지고 말 나뭇잎. 그게 바로 나였다.

"나 신경 쓰고 싶어. 때리고 맞는 게 정상적인 친구는 아니잖아. 아무리 네 친구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제 속상하다고 울고, 화난다고 버럭버럭 화내도 되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니까. 열일곱 살 때처럼 마냥 감정을 표출할 순 없었다.

사실은 나도 직설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는 인간 두 명이 모두 돌려 말하는 편이면 괜히 이상해진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는 대신 이불을 움켜잡았다. 부릅뜬 눈이 천장을 겨냥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순식간에 공기가 뒤바뀌었다. 뒤바뀌다 못해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쪼그라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마어마한 준비 끝에야 간신히 했다. 정작 말하고 나니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사실은 맥이 풀렸다.

모르는 척으로 일관한 나로 인해 우리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짝 선 긴장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인정한 것과 타인에게 인정한 나를 드러내는 건 달랐다.

나는 정현우를 재단기 위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칼을 휘둘렀다. 정현우가 나에게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의 세계에선 모든 사람이 그래도 돼,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따위의 긍정적인 응원이라도 해 줬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응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

나는 옅은 곰팡내가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결국 연민에 빠져 버렸다. 그래도 되는 세계가 있다. 안 되는 세계가 있고.

다시 돌아온 현실, 악을 앞에 두고 똘똘 뭉쳤던 영웅 무리는 이미 다 흩어진 후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가졌던 유대감은 평화로운 현실 앞에서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새 학기에 같은 반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그러하듯이 한 해만 유독 잘 지냈던 친구 사이, 반이 갈라지면서 사이도 소원해진 그저 그랬던 관계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설 수 있었던 거고. 그런데 나는 내가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까지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울고 싶었다. 분명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울했다. 얼핏 들은 정현우의 가정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모가 그에게 건넨 내 험담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쉽게 꺼내지 못할 비밀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할 거다.

나에게 사춘기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에 빠진 것과 같았다.

이욱찬은 좋게 말하자면 배포가 컸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달이나 양아치의 낌새를 그때부터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외로워.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앞뒤로 걸었다가 한 바퀴 돌았다.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 같았다. 그만큼 고결하거나 우아하진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나이 미상에, 누가 봐도 양아치 무리인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게 버겁기도 했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우울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 혼자 그 촌스러운, 붉은 꽃들이 수를 놓은 모텔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횟집 옆 편의점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지나치게 험난했다. 술로 슬픔과 우울함을 잊는 사람들은 무슨 수로 잊는 걸까.

모든 걸 잊자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나는 어젯밤 그 일이 혹시 내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는 전날 밤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이성이 또렷해질수록 더더욱.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에 후회를 실어 보내기로 했다. 밀려들었다 꺼지는 파도에 함께 내 마음을 보내기로 했다. 그게 맞다.

여행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끝나는 거구나. 여행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허무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기억이 공유되는 아래에서 그런다고?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작 입맞춤, 이게 뭐라고 모든 풍파를 다 겪는 것 같은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 한단 말인가.

성급하고, 조급하고, 다급한 녀석들이 우리를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영화 같았다. 나랑 정현우는 그냥 걷는 건데 주변만 빠르게 흘러갔다.

날 대할 때처럼 어색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날 새벽을 끝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났나 보다.

겉만 얼고 속은 액체 상태인 얼음. 그것이 우리 가족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엉뚱한 질문과 답만 늘어놓았다. 늦은 밤 켜 놓은 가로등 주변에 꼬인 날벌레처럼 주변만 빙빙 돌았다.

자존심을 세우지 말 걸 그랬나. 이게 아닌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평생을 괴로워할 줄 알았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죽기 직전에 피 토하듯 말을 쏟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그는 내가 오자마자 왜 장난을 쳤으며, 모르는 척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내심 티 내고 있던 걸까.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말라고.

어두운 방, 그의 주변엔 어둠뿐이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덩치로 인해 더 짙고 깊은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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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건지, 어디에서 받아 온 건지도 모를 이 작은 책상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쌍한 애들끼리 끌리게 되나 봐. 빌어먹을 선민의식일 수도 있다. 적어도. 적어도 선호의 상황이 욱찬보다는 나았으니까.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나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을 거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겠지. 이해한다.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일 수도 있고.

고독한 척, 비관적인 척은 그동안 혼자 다 해 놓고, 도대체 눈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바들바들 떨렸다.

선호는 샤워했다. 제 몸에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던 우울과 슬픔, 그리고 술과 담배 냄새까지도 모두 물로 쓸어 보냈다.

"배선호, 니 인생 망쳐 줄까?"

먼 미래의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알까. 그때는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지겠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과 감정마저도 역사의 산물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기 집은 돌아가고 훨씬 먼 주제에 꼬박꼬박 나를 집을 데려다주던 어린 이욱찬의 발걸음이, 우리 동네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욱찬은 대답 대신 멀어지는 비행기를 보았다.
"인생 망쳐 주냐고."
이욱찬은 그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 안 망할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망하지 마."

나랑 이욱찬은 멀어지는 비행기의 잔흔을 쫓았다. 우리는 대화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살자.

다만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온하고 평탄하기를, 허공을 떠다니던 이욱찬의 착륙을 받아 주는 활주로가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답답해. 가난이 싫다. 이럴 거면 대학도 오지 말 걸 그랬다.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걸.

어차피 보낼 돈도 없었는데 화라도 내지 말걸. 죄책감이 짙게 내려앉는다.

돈도 없는데 생색은. 헛웃음을 뱉었다. 빌려줄 돈도 없었으면서 짜증은.

욱찬에겐 이상한 책임감이 있다. 제 인생뿐만 아니라 선호의 인생도 본인이 책임져야 된다는 듯 굴곤 했다.

일정한 심장 박동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 지나간 과거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애정일까.

그동안 왜 피했나 싶었다. 여기도 우리 집인걸. 평생을 살아왔는데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언젠가는 말하더라도, 지금은 둘만의 시간, 둘만의 장소로 가고 싶었다. 눈치 보는 것 없이. 그곳이 비록 곰팡내가 나고, 햇빛도 어스름히 들어오는 반지하 원룸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랄해도 봐주자. 화내고, 짜증 내도 봐줘야지.

천안에 있었으면, 우리가 살아온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은 고달프고 벅찼다.

주어가 없어도 통하는 게 있다. 함께 걸어온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몇 년이 흘렀던 서툴고 불안한 연애지만, 그 불안을 잠재워 줄 만한 시간이 두 사람에겐 분명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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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제의 분풀이는 실로 뼈에 사무쳤다. 형벌을 받은 육체는 재가 되어 날아갔지만 혼은 고통으로 떨림이 멎지 않았다

어째서 비춘셩은 갑자기 적연을 언급했을까?

"그럼 산 사람은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게 하고… 죽은 사람은 개죽음당한 채로 내버려 두란 말이야?"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빨리 나가라며 그를 재촉했다. 적연에 더 머물렀다가는 무언가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떤 생각이 뇌리를 퍼뜩 스쳤다. 이런 ‘자각몽’은 항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곤 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 무엇과 만나게 될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를 검에 가둔 자는 또 누구인가?

하지만 살갗 아래에 어른거리는 혈관을 얼핏 보았을 뿐인데, 몇천 년 만에 느닷없는 갈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손바닥이 칼날을 받친 순간, 그의 등골에서 빼낸 이 검에 단번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검신에 새겨진 홈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불빛이 스치는 순간, 빛이 비친 검날에서 부드럽고 다정한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불에 타오르며 붉은빛으로 물든 사이에서도 여전히 살풋 웃고 있는 그 눈에는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온유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인마는 영성을 지닌 다른 물건에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이 두 분은 재빨리 생각으로 서로를 욕했다.

위기의 순간에 진심이 나오는 법. 다정다감하던 쉬엔지와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성령연은 환상적인 호흡으로 동시에 평화조약을 찢어발겼다.

그가 하는 말은 촘촘한 그물처럼 교묘하면서도 간단하게 상대를 뒤덮으며 일종의 착각을 일으켰다. 마치 그가 온 마음을 쏟아 자신을 총애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억울함, 비통함, 괴로움 같은 감정들을 전부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선천적 영물은 콧대가 높아서 다른 종족과 거의 왕래가 없으니, 보통은 후사를 보기 힘들어. 보통 이렇게 어린 요족은 동족에게 감싸여 보호받지 인간 세상에서 먼지투성이가 되도록 구르지 않는다. 족장이라고 자처하는 걸 보면 필시 무리에 변고가 생겨 어릴 때부터 돌봐주는 이가 없었을 터.’

그는 무심결에 저 피 같은 물이 고치처럼 응결되어 자신을 감싸, 눈도 귀도 막은 채 영겁의 세월이 흐르도록 자신을 숨겨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몸을 숨길 수 있는 한 치의 땅도 그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안식, 여유, 휴식… 그에게는 모든 것이 망념일 뿐이었다.

그 사람을 똑똑히 본 순간, 불현듯 어떤 격렬한 감정이 쉬엔지를 덮쳤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탄과 미칠듯한 환희였다. 두 개의 감정이 뒤엉키자 영혼까지 뒤따라 전율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여한이 마침내 끝을 맺은 것 같기도 했고, 가없이 어두운 밤에 오래도록 갇혀 있다가 마침내 한 줄기 새벽빛을 엿본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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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신 건지, 누구랑 마신 건지 알 수도 없다. 어쨌든 저 혼자 고주망태로 취해 나를 불러낸다는 사실이다.

일말의 양심이나 죄책감은 그에게도 있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저 혼자 술을 마시고, 내일 학교에 가야 되는 나에게 전화를 건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녀석이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딱 지금의 계절과 같다. 쓸쓸하고 외로운 늦가을.

아무리 그가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라고 한들, 그럼에도 나는 이욱찬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냥… 늘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욱찬은 이욱찬 나름대로, 나는 그의 옆에서, 때때로 쓰레기통 역할을 해 주면서.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일깨워 온 감정을 밟으며 종착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종착점이 동정인지, 애정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었는데 이욱찬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이 타올랐다.

성격에 높낮이가 없다. 그리고 다정하고… 나쁜 녀석은 아니다.

관계라는 게 마냥 웃고 떠들고,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깊게 사귀고 인연을 이어 가는 것도 극소수였다.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특별하게 대해 주던 정현우가… 왜 그런 말을 던지고 간 걸까.

그는 외로움을 추위라는 무기로 감춘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익숙한 것은 무섭다. 늘 보아 오고, 불러 왔던 것들. 사라져도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욱찬에게 내가 그런 존재일 거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와 과거를 건드려도 되었다. 이욱찬 부모님, 형, 누나… 사실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러하다.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나는 이욱찬이 나쁜 새끼라는 걸 알지만, 아주 예전부터 알아 왔지만 그렇다.

눈에 보이면 짜증 나고,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고, 안 보이면 걱정된다.

정말 걱정되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걸까. 단지 유흥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당하는 사람의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인정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나의 첫사랑은 결국 이 겨울바람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고여 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갈 거다. 그리고 그 겨울바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우정만이 남아 있겠지.

술로 모든 걸 비운다. 모든 게 다 술 때문에 벌어졌던 건데, 아빠의 폭력적인 성향도 술 때문에 빛을 보였고….

내 마음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고작 라면 한 젓가락뿐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묵묵히 살아가겠지. 제대로 대화조차 해 본 적 없는 형을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말이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도 없고 누나도 방황해 제대로 들어온 적 없던 집에 이욱찬을 버리고 그대로 나가 버린 형을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리면 어떤 사람이든 은인처럼 보이고,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듯이 두 사람도 그랬다. 그나마 가족이라고 할 만한 상대가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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