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던 커다란 궁을 떠올리며, 청와(靑蛙) 소리 가득한 자련전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곳 역시 바깥의 궁과는 또 다른 세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의 화려한 자태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니, 그제야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향이 아름다운 꽃을 알아볼 수 있군요. 이 또한, 좋은 듯합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잦아든 청와의 울음소리도, 조용하게 내려앉은 어둠도, 발밑을 스치는 풀 소리도, 그래, 어느 것 하나 나쁘지 않았다.
꽃놀이, 청우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멀거니 앉아서, 떨어지는 꽃잎을 헤아리기만 해도 하루해가 금세 지나리라.
거기에, 홍매화가 있었다. 이른 봄, 추위를 이겨내며 여문 꽃을 틔운 홍매화가 청우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하얀 비단은 봄을 시샘하며 녹지 않는 설원(雪原)이 되었고, 검은 먹은 절개 있게 뻗어 나간 가지가 되었으며, 붉은 얼룩은 가지 속에 피어난 홍매화가 되었다.
잔잔한 강가에 미끼를 던졌으니, 물고기가 걸려들기를 기다릴 때였다. 그러나 아직은 낚싯줄에 딸려올 고기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물밑의 움직임을 충분히 헤아려야 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순간, 놓치지 않고 낚아챌 수 있도록.
심중(心中)의 근원, 그것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를 닮은 고독이었다. 이 세상에 오롯이 저 혼자라는 고독함. 저를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사무치는 외로움. 청우는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 들였고, 아이는 그것을 분노로 발현시켰다. 그러나 사실은, 체념과 분노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제가 지켜야 할 이들이 슬퍼진다면, 그것이 제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위한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성한 심술궂음을 잘 파헤쳐 보면, 그 안에 작은 다정함 정도는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를 둘러싼 공기가 안온하게 바뀌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져도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가지고 싶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탐욕(貪慾)이 저를 휘감았다. 가지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치솟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정감 있게 흔들리는 걸음을 따라 사박사박, 졸음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나른했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사실은 다정하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실은 누구보다 다정했다.
오랜만에 저를 감싸는 봄바람과 눈을 즐겁게 하는 봄꽃, 그리고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건의 다정함에 청우가 벅찬 얼굴로 웃었다.
끓는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한없이 잠잠하던 물은, 그 순간을 넘어서고 나면 요란하게 들끓기 시작한다. 마치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다 급기야 손쓸 새도 없이 넘쳐흐르고 만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이미 물은 끓고 있었다. 조용히 쌓이던 열기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바뀔 뿐이다.
아무리 많은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해도, 제가 지켜야 할 단 한 사람이 무너진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청우와 함께 있으면 흔해 빠진 벚꽃도 아름다웠고,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봄꽃이 향기로웠으며, 서툴기 짝이 없는 연서가 간질거렸다.
꽃이 피었다. 자그맣게 싹을 틔운 여린 꽃이 건의 다정함 속에서 팽팽하게 부풀더니, 이윽고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화려한 꽃은 아니었다. 커다란 꽃도 아니었다. 바라는 것이 적고, 기대하는 것이 적은, 아주 소박한 꽃이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꽃보다 향기로운 꽃이었다. 자신의 향기로 사방을 물들이는, 진한 꽃이 피었다.
서툴다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서로에게 처음인 것들이 많아 아직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주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저밖에 없다, 그 말을 입속으로 굴려본다. 문득 가슴이 빠듯하게 저렸다. 그것은 이제까지 제가 알던 어떤 감정과도 다른 것이었다. 만족감과도 달랐고, 충만함과도 달랐으며, 포만감과도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셋을 모두 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황궁에서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잠자코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누구도 청우를 주목하지 않았고, 또 누구도 주목해서는 안 되었다. 남은 생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을 맞추어 걷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능청스러운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또 때로는 은밀한 속삭임에 귓불을 붉혔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상이 청우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바람이 멈춰 있을 때는…… 제가 바람을 만들면 되는 것이군요."
서글프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부당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의로운 일을 하겠다는데 누가 나서서 만류할 것이오. 게다가 이런 날을 대비하여 그대의 사람도 조정에 심어두었으니, 그대는 아무 걱정 말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시오."
‘예.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전하를 뵈니, 기꺼운 마음이 배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