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래는 향주에 폭설이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대혼란의 시대가 열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슬쩍 웃고 말았다

이곳에서만큼은 청회색 눈의 남자란 그다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정작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는 언제나 겉도는 존재였는데, 처음 지내는 지방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하니 씁쓸한 일이었다.

관모를 쓰고 나니 그나마 좀 나은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좌우지간 눈동자 색이 달라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한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인해 혈육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소녀의 말 때문인지, 왜 이제 와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번 손에 껴 보기라도 할 것을.

매일같이 두루마리의 산에 파묻혀 지새워야 했던 나날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못 할 짓이건만, 이루지 못한 일에는 늘 미련이 남는 법이다

이르게 등청하는 자신과 마주치고서 쾌청하게 웃는 얼굴이나, 칭찬을 들으면 소년처럼 쑥스러워하는 표정, 자신을 은애한다 말하던, 일말의 기대와 서러움으로 떨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을.

겨울이 끝나도 푸른 땅의 눈은 녹지 않음을 기억해 주시오.

백은래는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 생을 살았으며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했다.

가정이란 언제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상상해 보아도 백은래의 청회색 두 눈이 검은 빛깔로 바뀌거나, 북명족 명리홀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도에서 평화롭게 생을 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듯이.

별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그들이라면, 백은래와 주자헌 사이에서 흐르던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제국 전체를 휩쓸어 끝내 왕조의 흐름을 바꿀 만큼 거대한 지류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예견했을까.

신하로서 황제의 앞에서 취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가슴이 울렁여,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하면 이 울렁임이 진정되리라 믿는 듯이.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은 사방을 떠다니는 살구꽃 향기가 부드러운 탓일까.

등롱의 불빛이 일렁이며 주자헌의 미소에 따스한 색채를 더했다. 어둠은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고, 보석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봄밤의 정취가 그윽하여 숨이 막힐 듯했다. 주자헌의 목소리가 유독 달게 들린 것도 필시 그 때문이리라.

머나먼 북강에서 지내는 동안, 그도 가끔은 자신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지.

"도리와 인의를 모르고 살려거든 계속 그리할 것이지, 이제 와서 왜 돌아온답니까."

불현듯 살구꽃이 만개한 중정에 서 있던 주자헌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는 듯해, 아련한 미소가 짧은 순간 백은래의 입가에 걸렸다.

"……마음에 두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인을 본받아 관료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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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래는 향주에 폭설이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대혼란의 시대가 열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슬쩍 웃고 말았다

이곳에서만큼은 청회색 눈의 남자란 그다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정작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는 언제나 겉도는 존재였는데, 처음 지내는 지방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하니 씁쓸한 일이었다.

관모를 쓰고 나니 그나마 좀 나은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좌우지간 눈동자 색이 달라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한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인해 혈육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소녀의 말 때문인지, 왜 이제 와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번 손에 껴 보기라도 할 것을.

매일같이 두루마리의 산에 파묻혀 지새워야 했던 나날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못 할 짓이건만, 이루지 못한 일에는 늘 미련이 남는 법이다

이르게 등청하는 자신과 마주치고서 쾌청하게 웃는 얼굴이나, 칭찬을 들으면 소년처럼 쑥스러워하는 표정, 자신을 은애한다 말하던, 일말의 기대와 서러움으로 떨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을.

겨울이 끝나도 푸른 땅의 눈은 녹지 않음을 기억해 주시오.

백은래는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 생을 살았으며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했다.

가정이란 언제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상상해 보아도 백은래의 청회색 두 눈이 검은 빛깔로 바뀌거나, 북명족 명리홀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도에서 평화롭게 생을 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듯이.

별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그들이라면, 백은래와 주자헌 사이에서 흐르던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제국 전체를 휩쓸어 끝내 왕조의 흐름을 바꿀 만큼 거대한 지류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예견했을까.

신하로서 황제의 앞에서 취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가슴이 울렁여,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하면 이 울렁임이 진정되리라 믿는 듯이.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은 사방을 떠다니는 살구꽃 향기가 부드러운 탓일까.

등롱의 불빛이 일렁이며 주자헌의 미소에 따스한 색채를 더했다. 어둠은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고, 보석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봄밤의 정취가 그윽하여 숨이 막힐 듯했다. 주자헌의 목소리가 유독 달게 들린 것도 필시 그 때문이리라.

머나먼 북강에서 지내는 동안, 그도 가끔은 자신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지.

"도리와 인의를 모르고 살려거든 계속 그리할 것이지, 이제 와서 왜 돌아온답니까."

불현듯 살구꽃이 만개한 중정에 서 있던 주자헌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는 듯해, 아련한 미소가 짧은 순간 백은래의 입가에 걸렸다.

"……마음에 두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인을 본받아 관료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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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로진, 배후의 검은손을 낚을 미끼였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에 빠진 자에게 그 이후의 육체란 껍데기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로진은 ‘집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이것이 수천 년 뒤의 세상이다. 요족도, 인족도 없다. 법술 대부분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종이 속 전설이 되었다

이건 그냥 그와 아로진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이었나?

3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오랜 상징이었다. 열화와 백골 사이에서 태어나, 비통하고도 엄숙한. 그가 말도 웃음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 지금, 요사스럽고 기이하며 모순적인 신성(神聖)이 다시 한 번 시대를 뛰어넘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러나 쉬엔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 귀하디 귀한 1초를 아로진의 발치에다 총을 한 번 더 발사하는 데 썼다

흉포한 바람의 칼날은 쉬엔지의 옷에 얕은 흔적만을 남기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로진이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동천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의 산천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일몽을 꾸지만, 꿈에서 깨어나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걸로 그만이다.

꽃밭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땅에서 자란 그는 추위도 더위도, 아픔도 괴로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허황된 몽상 속을 노닐었다

이후 그 꿈들은 하나하나 깨져나갔건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 독약 같은 꿈에서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이 세계의 규칙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가 현재의 시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해 온 천지가 놀라움과 분노에 가득 차 천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껏 지내본 날조차… 단 하루라도 있었나…"

방금… 방금 불꽃의 실에 가슴이 뚫리고 벼락까지 맞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니까. 제일 아름다운 꽃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 번 피어난다고 했어. 일생에 한 번 잠깐 피었다가 곧 져버리지.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던 일 몇 가지만 떠오를 뿐이래. 모두 부싯불처럼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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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만큼은 청회색 눈의 남자란 그다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정작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는 언제나 겉도는 존재였는데, 처음 지내는 지방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하니 씁쓸한 일이었다.

관모를 쓰고 나니 그나마 좀 나은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좌우지간 눈동자 색이 달라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한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인해 혈육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소녀의 말 때문인지, 왜 이제 와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번 손에 껴 보기라도 할 것을.

매일같이 두루마리의 산에 파묻혀 지새워야 했던 나날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못 할 짓이건만, 이루지 못한 일에는 늘 미련이 남는 법이다

이르게 등청하는 자신과 마주치고서 쾌청하게 웃는 얼굴이나, 칭찬을 들으면 소년처럼 쑥스러워하는 표정, 자신을 은애한다 말하던, 일말의 기대와 서러움으로 떨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을.

겨울이 끝나도 푸른 땅의 눈은 녹지 않음을 기억해 주시오.

백은래는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 생을 살았으며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했다.

가정이란 언제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상상해 보아도 백은래의 청회색 두 눈이 검은 빛깔로 바뀌거나, 북명족 명리홀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도에서 평화롭게 생을 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듯이.

별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그들이라면, 백은래와 주자헌 사이에서 흐르던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제국 전체를 휩쓸어 끝내 왕조의 흐름을 바꿀 만큼 거대한 지류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예견했을까.

신하로서 황제의 앞에서 취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가슴이 울렁여,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하면 이 울렁임이 진정되리라 믿는 듯이.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은 사방을 떠다니는 살구꽃 향기가 부드러운 탓일까.

등롱의 불빛이 일렁이며 주자헌의 미소에 따스한 색채를 더했다. 어둠은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고, 보석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봄밤의 정취가 그윽하여 숨이 막힐 듯했다. 주자헌의 목소리가 유독 달게 들린 것도 필시 그 때문이리라.

머나먼 북강에서 지내는 동안, 그도 가끔은 자신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지.

"도리와 인의를 모르고 살려거든 계속 그리할 것이지, 이제 와서 왜 돌아온답니까."

불현듯 살구꽃이 만개한 중정에 서 있던 주자헌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는 듯해, 아련한 미소가 짧은 순간 백은래의 입가에 걸렸다.

"……마음에 두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인을 본받아 관료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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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로진, 배후의 검은손을 낚을 미끼였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에 빠진 자에게 그 이후의 육체란 껍데기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로진은 ‘집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이것이 수천 년 뒤의 세상이다. 요족도, 인족도 없다. 법술 대부분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종이 속 전설이 되었다

이건 그냥 그와 아로진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이었나?

3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오랜 상징이었다. 열화와 백골 사이에서 태어나, 비통하고도 엄숙한. 그가 말도 웃음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 지금, 요사스럽고 기이하며 모순적인 신성(神聖)이 다시 한 번 시대를 뛰어넘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러나 쉬엔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 귀하디 귀한 1초를 아로진의 발치에다 총을 한 번 더 발사하는 데 썼다

흉포한 바람의 칼날은 쉬엔지의 옷에 얕은 흔적만을 남기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로진이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동천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의 산천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일몽을 꾸지만, 꿈에서 깨어나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걸로 그만이다.

꽃밭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땅에서 자란 그는 추위도 더위도, 아픔도 괴로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허황된 몽상 속을 노닐었다

이후 그 꿈들은 하나하나 깨져나갔건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 독약 같은 꿈에서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이 세계의 규칙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가 현재의 시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해 온 천지가 놀라움과 분노에 가득 차 천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껏 지내본 날조차… 단 하루라도 있었나…"

방금… 방금 불꽃의 실에 가슴이 뚫리고 벼락까지 맞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니까. 제일 아름다운 꽃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 번 피어난다고 했어. 일생에 한 번 잠깐 피었다가 곧 져버리지.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던 일 몇 가지만 떠오를 뿐이래. 모두 부싯불처럼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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