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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은행 이야기 - 착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다
데이비드 본스타인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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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은 기업들이 정부, 비영리단체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빌게이츠는 대표적인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 사람이다. 하버드를 중퇴하고 친구 두명과 시작한 조그마한 벤처기업을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키워냈고, 자신은 10여년 동안 세계 1위 부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성공 신화에는 독과점과 끼워팔기 등의 깨끗하지 못한 경영 전략이 숨어있다. 하지만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으랴, 그는 기부에서도 세계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빌 게이츠가 주창한 창조적 자본주의와 그의 기부정신은 훌륭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개같이 벌어본 자의 눈물나는 반성이 아니라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 사람은 없을까. 빌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발언 이후 이런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많은 기업들 중 여기 좋은 본보기가 한 가지 있다.
2006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그라민 은행과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
무하마드 유누스. 그는 1940년 방글라데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후에 33살의 젊은 나이에 치타공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삶의 큰 곡절없이 평탄하게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1973년의 방글라데시 대홍수와 함께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닥쳐왔다. 홍수로 인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로서 이런 커다란 경제위기 상황에 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데 정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몇 명과 함께 주변의 마을을 방문해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재료를 사서 가공해 물건을 만들어 내다 팔려고 해도 재료 살 돈이 없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면 물건을 만들어 내다 팔아도 근근히 끼니를 때울 정도의 돈밖에 손에 쥘 수 없다는게 그들의 공통된 말이었다. 그 재료값이란게 단돈 20달러 정도.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유누스는 사비를 털어 6명의 마을 주민에게 갚지 않아도 좋다며 돈을 빌려줬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사업이 점점 확대되었고, 1983년에는 직접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라민 은행은 지난 2월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서만 743만명에게 돈을 빌려줬으며 회원 중 60%정도가 절대빈곤에서 탈출했다.
그라민 은행의 업적이 더욱 눈부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 없이 소액의 금액(우리돈으로 평균 약 10~15만원 정도)을 절대 싸다고 할수 없는 이자(연이율 15~20%)로 빌려줬음에도 이렇게 눈부신 성과를 얻었다는 데 있다. 또한 원금 상환율은 세계 굴지의 은행들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98%에 달하며, 1993년 이후로 흑자경영을 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에만 2000개 이상의 지점이 있으며 직원은 18000명 이상이다.
어떻게 이렇게 기적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그라민 은행의 대출의 핵심이 '마이크로 크레딧(무담보 소액 대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융자'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라민'이라는 말이 방글라데시어로 '마을'을 의미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연대를 중요시한다. 돈은 대체로 여성들에게 빌려주는데, 돈을 빌릴 때 혼자서는 빌릴 수 없다. 돈을 빌릴 사람들이 마을 단위로 10여 명씩 모여서 함께 그룹을 만들고 대출은 항상 이 그룹단위로 이루어진다. 이 그룹은 돈을 빌릴때 조직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 유지되면서,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이자도 모아서 함께 갚는다.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에서 수동적으로 살아온 여성들은 이런 모임을 통해서 서로 도와가며 빠져나올 수 없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품게 되고, 얼마 안되는 작은 종잣돈만으로도 꿈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정도면 그라민 은행에서 빌려주는 것이 돈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 정도가 아니라 '정승같이 쓰기위해 돈을 번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