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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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흔살 할아버지로 태어나, 점점 나이를 거꾸로 먹고, 유아가 되어 죽는다? 참으로 재밌는 상상이다. 나이 들어감이 서글플 때,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는 "나이 거꾸로 먹기"! 이 사회의 틀이, 이미 "나이 줄어듬"이 아닌 "나이 늘어감"에 맞게 짜여 있기 때문에, 나이를 거꾸로 먹는 돌연변이로 태어나 사는 삶은 분명 고달파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욕심도 많아지고, 미련도 많아지는 노후의 삶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보다, 점점 그 기억을 잃고, 순수한 아기가 되어, 머리도 비우고, 마음도 비워낸 후,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소설의 대가인 F.스콧 피츠제럴드도 그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그 또한 나이 거꾸로 먹기를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크트웨인의 말>
"전지전능한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적에 내가 그 분을 보조할 수 있었으면 인간이 지금과는 정반대로, 즉 늙은 몸으로 삶을 시작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늙은 몸으로 태어나 노년의 비탄과 무분별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을테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진다면 나이 먹는 것을 꺼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늙어가는게 아니라 젊어지는 삶을 살게 되니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여든이 아니라 열여덟 살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맞습니다. 신께서는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한 겁니다. 지금이라도 내 도움을 받아주시면 좋을텐데 말이죠."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소설의 힘이다. 단편 소설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함께하다보니, 그리 짧다는 느낌은 안 든다. 게다가 그림 소설, 만화로 그려진 짧은 소설이라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내겐 신선했다. 상상 속에선 어렴풋했을 그림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었고, 한편의 영화를 보듯, 손쉽게 영상화 되었다. 실제로 2월에 영화로도 개봉이 된다고 하니, 마음으론 이미 예매를 끝냈다. 내 나이 70이 되었을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어떤 장치가 꼭 발명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벤자민 버튼 같은 삶으로 내 인생을 거꾸로 한번 더 살아보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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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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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거침없는 것 같으면서도 정갈하게 계산된 듯한 시인 함민복 씨의 언어가 참 좋다. 시집 <말랑말랑한 힘>에서도 유연하게 풀어놓은 시들이 힘있게 와닿는다. 길, 그림자, 죄, 뻘... 이렇게 총 네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장마다 색깔과 향기가 뚜렷하다. 추상적인 "길"이 아닌, 우리가 늘 다니고 있는 그 길 위에서 쓴 듯한 시는 참으로 현실적이다. 지금껏 내 분신처럼 따라다녔지만 한번도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없었던 내 "그림자"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경건해야 할 단어임에도 어느덧 무디어져 있는 "죄"에 대해 칼날 선 죄의식을 심어준다. 말랑말랑한 "뻘" 위에서 짭쪼름한 바다내음 맡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할만큼 시의 말랑말랑한 향기를 확실히 전해준다. 그의 작품을 모조리 다 찾아서 읽고 싶어졌다. 마음이 분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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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시 구절들>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시 <물> 중에서-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시 <그림자> 중에서-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시 <죄> 중에서-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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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
최복현 지음 / 휴먼드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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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우리집엔 책이 참 많았다.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책은 많이 읽어라"는 엄마의 교육방침 덕에, 웬만한 고전들은 전집으로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 책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제목만 얘기하면 저자가 자동으로 튀어나올만큼 책표지는 완벽하게 내것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내용을 파고들면 도통 어려워서 좌절감을 느낀 것이 몇번인지 모르겠다. 그럴 때면 번역이 이상해서 책 내용도 이상한 거라고, 어른이 되면 이 고전들을 원본으로 모두 찾아서 읽어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스스로를 위안하곤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고전은 여전히 어려웠다. 괴테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독파하겠다고 덤볐지만 "고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이토록 정복이 어려운 것인가, 다시 한번 좌절하며, 고전은 평생 숙제로 안고 가야겠다고 포기했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책 한권을 만났다. <책 숲에서 사람의 길을 찾다>!! 보통 숲을 떠올리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앞서 간 사람의 흔적이 있으면 그 길을 따라가거나, 수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 막막함을 떠올리게 하는 "숲"이라는 느낌은 내가 고전을 접했을 때 느끼는 막막함과 유사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정말 "길" 하나를 찾은 느낌이다.

  총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아름다운 꿈과 용기> <살며 생각하며> <여러 사랑의 색깔들> <삶의 모순들> 이라는 소 주제를 가지고 22편의 고전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각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의 삶과 접목시켜 꽤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고전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지, 각 작품마다 줄거리를 요약해주기 때문에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저자의 분석을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각 문예사조에 관한 명쾌한 정리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학창시절 국어를 암기과목으로 생각하게 했던 문예사조가 쉽게 정리되어 있어 반가웠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고전을 이해하는 훌륭한 창이 되어 준다. 가령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경우, 그저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한 시각과는 달리, 저자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을때"란 어떤 때인지에 관해 화두를 던지면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인 마지막 잎새의 줄거리를 친절하게 요약해주고, 거기에 덧붙여 "부익부 빈익빈의 작가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고, 그저 조연이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의 친구에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아름다운 우정의 시절"을 얘기한다. "희망과 절망사이"라는 소설주제에 관한 정리도 잊지 않고, "가장 위대한 명화"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나아갈길도 슬그머니 제시해준다. 또한 고전주의의 특징이라고 언급한 "사실임직함"과 "예의바름"의 원칙, 시간 장소 스토리의 "3단일원칙"을 그대로 접목해봄으로써 고전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명확히 하게 된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동안 고전을 접하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다. 숲 사이로 나 있는 길이 이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저자인 최복현님이 학창시절 나의 국어선생님이었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랬다면 아마 고전과 좀 더 일찍 친해지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늘 힘겹게 올라야 하는 산으로만 느껴졌던 고전을 피톤치드를 내 뿜는 산림욕장을 걷는 기분으로 한편 한편 정복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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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 누가 감히 '한다면 하는' 나라 미국을 막아서는가
아브람 노엄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데이비드 버사미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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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의 지구촌은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물결 속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미국의 모기지론사태로부터 촉발한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그와 함께 불어 닥친 불황과 실업의 공포! 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도 심각해져 북극빙하의 녹는 속도가 심상치 않은 재앙으로 이어질까 촉각을 곤두서게 한다. 그리고 지구촌 곳곳이 영토분쟁과 핵무기개발, 각종 테러 등으로 여전히 일촉즉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며,최근엔 무서운 멕시코 발 신종 독감바이러스이 전세계로 확산돼 모든 지구촌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출렁이듯 변화무쌍한 세상의 중심에 있는 나라는 여전히 미국이다. 탈냉전시대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패권을 장악하며 성장한 미국! 하지만 영원한 승자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패권주의 미국 역시 변화의 물결에 흔들리는 모습이다. 그 견제세력으로는 단연 중국과 일본이 우뚝 서 있으며, 인도와 러시아 또한 기회를 엿보며 꾸준히 힘을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촘스키를 통해서 지난 미국의 대내외적인 정치, 경제 문제의 큰 획들에 대해 들어왔다. 아직 시대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근간의 역사에 대한 진실성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렇지만, 촘스키는 꽤 단오한 의지로 지난 사건들의 진실에 대한 고찰과 고발을 서슴지 않는다.  

  촘스키는 이 책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에서도 중동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 속에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미국의 실체와 지구촌의 패권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기반을 닦고 있는 미국의 본심, 그리고 민주주의로 위장된 미국의 비민주주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도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으로 인한 국민의 눈가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분명 역사의 왜곡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의 왜곡은 민주주의로 포장한 총칼로 국민들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촘스키가 이러한 비밀스럽고 민감한 진실들을 책으로 남기는 것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이는 기록을 통해 왜곡을 막기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역자는 옮긴이의 글을 “촘스키의 책이 필요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나의 바람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촘스키의 책이나 시대적인 고발이 없는 유토피아적인 세상을 꿈꾸기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 제3의 촘스키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소 세상과 역행하는 듯 보일 수는 있지만,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은 반드시 필요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그런 인물이 되었을 때, 진정 촘스키의 책이 필요 없는 보다 빛나는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성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인 촘스키와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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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 사회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31
노명우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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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텔레비전을 공짜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 오산입니다. 텔레비전은 광고업자들에게 시청자를 팔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텔레비전 앞에서 "시청"이라는 걸 하면서 노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무임금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구요."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 그 물건이 필요해서 샀다고 생각하지만 그 배후에는 텔레비전이 생활양식까지 팔고 있었음을 알고 있나요?"

 "광고를 보고 있는 당신은, 마치 장터를 거닐고 있는 사람과도 같답니다."

이 책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을 읽고나니, 주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아졌다. 

우리는 텔레비전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집에나 거실의 가장 중심 위치에 텔레비전이 놓여있을만큼, 텔레비전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거실을 벗어나면 텔레비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다. 기차역 대기실이나, 심지어 고속버스 안에도 텔레비전을 틀어주니 하루라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은 단순한 가전제품의 가치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만들고, 조정하고, 통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 하나! 

우리는 텔레비전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TV를 켜고 (On), 볼륨을 높이고 (Volume), 채널을 틀고 (Channel), TV를 끄는 (Off) 기본적인 TV 조작을 다 할 줄 아는 것만으로, 텔레비전에 대해선 모두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진 않은지...저자는 보란듯. 이 네가지 (on, volume, channel, off) 를 가지고, 텔레비전과 관련된 모든 메카니즘을 풀어낸다. 신문이나 영화를 누르고, 텔레비전이 탄생하게 된 배경, 텔레비전이 최고의 미디어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 (on)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관점에서 바라본 텔레비전 (volume) 텔레비전을, 외부 세계가 개인의 사적공간으로 들어오는 일방통행로라고 분석한 것 (channel) DMB나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등장에 따른 텔레비전의 위기에 대한 경고! (off)  

저자는 이 책에 "세상으로 난 전자 창문에 대한 텔레비전 키드의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세상으로 난 전자 창문!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이 어디든 들여다볼 수 있는 TV를 말한다. 텔레비전 키드! TV가 세상에 나온 이후 태어난 세대로 TV가 친구이자 선생님이자 부모님이 되었던 세대다. 우리 모두 텔레비전 키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제목은 저자 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 텔레비전에 대해 성찰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이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가 학자임을 내세우기 보다, 평범한 텔레비전 시청자임을 자처하며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자신도 텔레비전을 쉽게 끌 수 없다고, 텔레비전 보NT-SIZE: 11pt">우리집 거실에도 중앙에 텔레비전이 놓여있다고 말하니 학자가 아닌 시청자, 엄밀히 말하면 "일반인보다 조금 깨어 있는 시청자" 인 그의 말에 더욱 귀기울이게 된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제목이 주는 느낌은 참 푸근하다. 하지만 이 책은 텔레비전에 아무 생각 없이 빠지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구나 소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유명인들이 입고 나오는 옷과 머리 스타일대로 따라하는 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라 착각하고, 방송에서 기아체험 특별 생방송을 하면, 지구상에 굶어죽는 어린이들이 많음에 가슴아파하면서 방송에서 잠잠하면, 이 세상의 기아문제가 다 해결된 줄 아는 게 지금의 우리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엘리트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 매도하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폄하한다.
이 책은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을 버리자고 선동하기 보다는 왜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버리지 못하는가’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러면서 텔레비전과 시청자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무엇인지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결국 시청자가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쌍방향으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분별하게 흘러들어오는 뉴스와 정보, 광고와 다채로운 프로그램 속에 익사하고 말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텔레비전 다음 세대로 등장하고 있는 인터넷과 DMB 같은 뉴미디어들이 텔레비전의 단점을 보완해 등장한 만큼 텔레비전 또한 바뀌지 않으면 안되고, 거기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시청자가 될 것을 더불어 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텔레비전 시대는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였다. 영화가 텔레비전에 의해 살해당했던 것처럼, 텔레비전이 다른 미디어에 의해 살해당할 것인가! 텔레비전이 스스로 꺼지는 종말에 대해서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텔레비전을 끄는 것이 텔레비전의 종말일까? 텔레비전을 버린다 해도, 우리가 텔레비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버리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텔레비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텔레비전 시대에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유혹과 통제의 흐름에 빠져 익사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는 텔레비전을 끄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듣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었다. 난 텔레비전을 끌만큼의 용기는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은 분명 어제와 다른 텔레비전임이 분명하다. 

텔레비전 시대! 텔레비전을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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