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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없이 살자
김하원 지음 / 자화상 / 2018년 6월
평점 :

' 세계일주 D-day'
누군가에겐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날이고, 누군가에겐 미지와 불안의 세계로 떠나는 날이다. 분명 같은 날인데 마음은 극과 극이었다. 세상의 어떤 즐거운 일도 내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을 날에 나는 두려움으로 밤을 샜다. (54p)
나의 자발적 선택으로 시작한 여행이라면 이 정도까지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삶,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불안 에너지도 생기는 것 같았다. 내가 의지를 갖고 할 때는 긴장은 다소 될 수 있으나 과도한 불안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수동적 삶과 능동적 삶은 한끗 차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94p)
자연과 늘 함께 사는 이곳 사람들도 쫓기듯 사는 우리의 삶처럼 치열할까? 아니면 우리보다 더 행복할까? 적막감마저 감도는 한적함과 삶의 순간순간을 음미하는 여유가 참으로 부러웠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행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신랑이지만 여행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곳을 다니자고 약속했다.(140p)
기쁨보다 슬픔을 함께할 때 더 깊은 삶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 함께 걸어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우리 둘. 여행 전 꿈꿨던 우리의 모습에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이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151p)
전통적 사고나 사회적 규범이 만든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던 우리는 이제 우리만의 룰을 만들어 지켜나가기로 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175p)
비자발적 딩크, 아이 없는 부부가 중년에 떠난 세계여행 이야기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여린 여자는 자꾸 상처를 받는다. 대화를 시도할수록 더 깊은 동굴에 숨어버리는 남편. 여자는 결국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이석증, 공황장애, 불안장애를 얻는다. 그 와중 아이는 안 생겨 시술도 받아보지만 자궁 선근증 수술로 인해 아예 임신을 바라지 못하게 되었다. 폭풍 같은 시간 속에서 갑자기 남편이 꺼내든 카드는 '세계여행' 스트레스로 인해 얻은 병들 때문에 비행기는 꿈도 못 꾸는데 변화가 필요하다며 세계여행을 가자고 한다. 떠나기 전부터 걱정에 비행기 타고 나서도 걱정, 도착하고 나서도 걱정, 여행 내내 걱정. 처음엔 남편의 무관심과 쌀쌀함, 매정함, 부하직원처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진짜 저런 사람이랑 못 살겠다.' 생각했는데 매일매일 하루 종일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저자를 보고 '아 이 남자도 나름 힘들겠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아내를 남편은 타국에서 잘 보듬어주었고 당연히 싸움도 일어났다. 타국 가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안주는 남편, 그게 너무 서러운 아내. 내 생각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타박하고 무안주는 남편이 100프로 잘못인 것 같지만 그는 모르는 듯하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 부부의 운명은 어찌 될까. 이러다 세계여행 가서 이혼하는 거 아닌가 했지만 역시 말 안 통하는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하루 종일 붙어있어야 하는 세계여행. 미우나 고우나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이 사람뿐이고 내가 아프면 걱정해주는 사람도 이 사람뿐이다. 고산병에 걸려 아내의 아픔을 공감하는 남편. 몰라도 되는 아픔을 알게 되어 안타까워하는 아내. 서로 너무 사랑하지만 표현 방법이 달랐을 뿐이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그렇다. 타인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변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변하는 게 훨씬 쉽고 편안하다. 자존감이 높아진 저자는 남편에게 예전만큼 상처받지 않는다. 여행기가 아닌 한 부부의 성장기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