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처음 방문을 잠근 날 - 자존감, 효능감을 높이는 독서처방전
최희숙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아이가 처음 방문을 잠그는 날이 도래할까? 자녀가 방문을 잠그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문을 잠그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부모는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 <자존감, 효능감을 높이는 독서처방전>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책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본다. 책이 좋은 점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서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꼭, 필수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어야만 자신의 편협한 사고 속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전히 아이가 잘못을 하면 때려야 한다, 혹은 때려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가끔 엉덩이 팡팡 정도야 그렇다고 해도 누가 봐도 '학대'로 의심되는데 잘못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자기 자식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모두 다 같겠지만 육아 방식에 의해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작가는 논술선생님이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추천도서니까 읽어가 아니라 이 책은 두껍지만 읽고 나면 다른 책을 읽기 쉬워질 것이고 이 책은 가볍지만 다른 책을 시도할 때 조금 힘들 수도 있다 어떤 걸 읽고 싶니? 물어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두껍고 어려운 책을 고른다고 한다. 도전하고 싶은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힘든 학생에게는 구슬을 예를 들어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30분에 몇 페이지 읽는지 살펴보아 일주일에 읽을 수 있는 양을 할당해준다. 아이는 뿌듯함을 느끼고 그 감정은 자존감, 자신감 상승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잘못을 저지를 때 괴롭고 화가 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무지와 부족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다. 아이가 나와 닮아서 행복하고 기쁘지만 아이의 잘못이 꼭 나의 잘못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친구와 비교하지 않고 아이 그대로를 바라본다면 무엇이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따질 수가 없을 것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아이의 선택이 힘듦을 예상하는 걸 뻔히 알기에 대신 선택을 해줄 때도 있다. 어른들에겐 최선이기에 아이들을 위해 한 선택이지만 아이는 주도권을 뺏겼을 뿐이다. 더 나은 선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독서임계점이란 말이 가슴속에 와닿았다. 처음 독서를 시작하고 읽기 쉬운 책들만 읽었다. 그러다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한 번 굉장히 읽기 힘든 책을 받았다. 만약 내가 돈 주고 샀거나 도서관에서 빌렸다면 읽지 않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평을 쓰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정말 문자 그대로 꾸역꾸역 읽어내려갔다. 뿌듯했다. 이후 나는 어떤 책이든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독서임계점처럼 자녀에게도 자녀임계점을 두어 임계점을 넘어 인내하면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 부모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다. 우리는 아이의 행동 그 자체만을 본다. 화를 내면 왜 화를 내니, 묻는다. 아이는 정확히 설명할 줄 모른다. 우리가 아이의 행동 뒤의 욕구를 알아차려야 한다. 아이에게 공감해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참 쉽지가 않다. 이렇게 또 반성하고 배운다.


먼저 내가 채워져야 했다.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고, 없는 걸 주려고 하니 지치고 거칠어졌다. 자녀를 키우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였다.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굳이 건드려지지 않았을 치부가 생살로 낱낱이 드러났다.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 뻔했다.(10p)

내게 성장이란 지식의 덧붙여짐이라기보다 기존의 무지가 깨지는 과정이었다. 무지와 왜곡된 생각이 깨지는 만큼 성장했고, 성장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선물을 주었다.(11p)

변해야 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보는 나의 시선이었다.(27p)

아이의 온전함을 믿는다는 것은 잘 살고 성공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무탈하게 살아갈 것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삶을 살든 아이가 삶의 주인이고 그 모든 것을 겪어낼 가치가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어지니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보다 앞서던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꽤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빼앗은 왕관을 돌려주듯 아이는 아이 삶의 주인이 되고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었다.(57p)

현실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함으로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78p)

아이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것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가슴을 찌른다. 공감 없이 옳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이에게 유익했을까?(97p)

긍정이라는 말은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러한 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긍정이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긍정할 필요가 있다.(109p)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순간 내가 더 지혜롭다는 생각으로 아이의 결정권을 가로챈 적이 많았다. 아이들이 차츰 커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 정말 중요한 건 어떤 나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 그 자체라는 것이다.(117p)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겪고 있는 마음 상태를 잘 들여다보고 행동 뒤에 숨은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려 주는 것, 공감해주는 것, 고개 끄덕여주는 것이다. (130p)

습관화된 나를 넘어서고 싶었다. 습관의 한계를 넘는 행동은 다리찢기처럼 잠시 몸서리쳐지지만 한번 임계점을 넘고 나면 그 다음은 일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33p)

내가 아는 또 다른 정확한 한 가지는, 아이가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조력자 역할만을 해야 한다.(……) 무엇인가 결정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의 결정과 경험이 동일함을 알게 된다.(…) 결정하고 경험하는 것이 책임이 되는 것이다. 책임감이란 자신이 결정한 그것을 경험함으로 책임이 되는 것이다.(16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돌아눕는 상상만으로도 서운해집니다 - 작은 몸짓 하나에도 헛헛해지는 마음에 대하여
오휘명 지음 / 문학테라피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내 마음이 커져 사랑이 상대방이 찌르는 것이 될 때 헤어짐을 경험한다. 그럴 때는 커지는 내 마음을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한다. 관계는 이어질 수 있지만 그 사랑은 단물이 쏙 빠진 흐물흐물한 껌 같은 사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닌.

이런 고백을 받는다면 어느 누가 감동받지 않을까. 단순한 말 한마디가 소중하다곤 하지만 자기가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어찌 알까. 이렇게 구구절절,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마음이 참 달콤하게 느껴진다.

외로워서, 누구라도 사귀고 싶어서 애쓰던 모습은 볼품이 없다. 알고 있으면서도, 외롭기 때문에 애쓸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보면 그 모습이 볼품없어 후회를 한다.

아마 이 작가는 사랑을 한다면 제대로(?) 할 거라 예상된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떼어주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루뭉술하게 주어 없는, 그저 보여주기 식 사랑 에세이가 아닌, 공감을 형성하는 이 작가의 글솜씨는 나의 마음을 살랑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넓은 곳에 혼자 편하게 누워서 자는 것이 소원이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엄마의 뒷모습을 봐야 했던 아이와 아내의 뒷모습을 봐야 했던 남편은 얼마나 서운했을까. 좀 불편하더라도 안아주자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거벗은 그리스도인 - 교만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나를 고발합니다
문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53년 전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을 찾아왔던 27세의 젊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는 복음 한 번 전하지 못하고 대동강가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무지에 갇혀 살던 우리 조선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21세기에 신석기 문명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식인 풍습을 가진 파푸아뉴기니 미히 부족과 함께한 25년 선교생활을 이 책에 담았다.

여자의 인권은 전혀 없는 그곳,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사서 사는 것이 자랑이 되며,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굳은 일은 여자가 다 한다. 여자는 새끼 멧돼지를 자기 젖을 먹여 키워놓으면 남편은 그 멧돼지를 주고 다른 여자를 사온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죽기 일쑤이고 물건은 당연한 듯이 훔쳐간다. 식인풍습은 사라졌지만 최고의 칭찬은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몸 일부를 먹겠다'이다. 그들의 말을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말씀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알려주어야 한다. 단순히 선교사면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고립된 곳에 가서 목숨을 거는 걸 보고 정말 대단하다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문성 선교사는 끊임없이 뉘우치고 깨닫고 회개한다. "그들은 벗었으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나는 위선의 옷을 입은 영적 원주민이었습니다."

가진것이 없는 자, 부족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에 더 알맞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고 목숨 걸고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이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미신과 주술사에 인해 죽음의 공포 속에 떨며 살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에게 모든 걸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아프면 의사부터 찾지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 나 또한 셋째가 희귀난치병 진단을 받았을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우리나라 의술이 좋으니 한국에서 가장 좋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돼'였다. 그리고 오만하게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줘'라고 기도했다. 모든 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문성 목사는 그 경험으로 인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만약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죽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문성 목사가 겪은 일들을 읽고 있자면 기적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 준다고 했던가? 모두들 죽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여전히 선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죽을테니 마음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마음 편하게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겠다고 마음을 편안히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굳건하고 진실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마히 부족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말이 없다. 특히 죄와 용서라는 단어가 없다. 죄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죄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죄는 단순히 나쁜 것으로,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도로 이해한다. 아무리 이런 것을 죄라고 한다고 가르쳐도 그것이 왜 죄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죄의식도 없고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어떠한지 우리는 가늠하기 어렵다. 아마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의존하는 삶이지 않을까 한다. 그런 까닭에 죽음의 공포가 그토록 큰 것이다.(293p)

죄와 용서라는 단어가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눈물 흘리고 죽음으로 복수를 하던 사람들이 용서를 한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는 물건도 훔쳐가지 않으며 물건을 누가 훔쳐가도 찾아가 벌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 복음으로 인해 미히 부족 사람들은 바뀌고 있었다.

선교사는 이미 구원받아 택함 받은 축복된 자녀이며 일꾼이다. 그리고 복음은 고난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며 어두운 곳에서 그 빛이 밝게 빛난다.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택하여 어려운 환경의 사역지로 보내겠는가? 아직도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382p)

그들은 복음을 듣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함과 기쁨을 누린다. 십자가의 능력이다. 선교사들이 어려운 환경에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다.

25년간의 선교생활을 들여다보니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켜보고 자식들과 떨어져 살면서 질병과 기아에 노출되어 매일 일용할 양식을 달라 기도해야하는 곳에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 한 몸을 바친다. 아이들은 감기에만 걸려도 죽는다는데 선교사가 준 약으로 질병을 치료할 때 조심해야한다고 한다. 선교사들을 신으로 여길까봐다. 잘못된 이단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사람이니 신처럼 대하라고 하면서 사기치고 성폭행저지르는 일부 목사들과 비교가 되면서 문성 목사 부부는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꼈다. 알지 못했던 선교생활 이야기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그리고 미신과 주술의 공포로 인해 벌벌 떨며 살아가야했던 미히 부족들이 자유와 기쁨을 보며 머릿속에 많은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하게 해줄게
소재원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재원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낯설지가 않았다. <비스티 보이즈>,<소원>, <터널>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세 개나 된다.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우리'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작가다. 이 작품 <행복하게 해줄게>도 2015년 1월 10일 청주에서 당시 29세 가장이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다 뺑소니 당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케이크 못 사고 크림빵 사가서 미안하다,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훌륭한 부모가 되자고 말하는 그는 그저 선량하고 착한 시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부부도 착하다. 너무 착하다. 무식한 게 가난하다고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돈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애를 낳는다고 욕한다. 무식해서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해서 무식한 거라고 책 속의 아내는 말한다. 월급을 받지 못해도 노동청에 신고하지 못하는 건 그동안의 돈을 받지 못할까 봐 약자이기 때문이며 국민의 힘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한 시간은 6000원 벌 수 있는 시간이기에 촛불집회에 나가지 못하는 거라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기준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비난을 한다. 잘못인 걸 알면서도 아닌 걸 알면서도 감사합니다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현실, 한 푼 한푼이 아쉽고 그 한 푼이 없으면 아내와 자식이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느냐, 왜 야간수당도 못 받고 일을 하느냐 누가 욕할 수 있는가. 왜 뼈가 부러졌는데도 퇴원을 하며, 만삭의 몸으로 한 장에 10원짜리인 마스크팩을 포장하는지, 왜 몸을 그렇게 혹사시키느냐고 누가 그들에게 비난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가해자를 비난하기 보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한다. 착한 사람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당한다. 책 속의 부부가 너무 착하다. 두 번의 뺑소니를 당하고, 너무 가난해서 아이에게 장난감 하나도 못 사주고 임신해서도 먹고 싶은 족발 하나를 못 사 먹어도, 뺑소니 가해자를 잡고 나서 '용서해 달라' 말하는 부부. 첫째 아이와 태어날 둘째 아이에게 훌륭한 부모가 되고 싶기에 자신을 치고 버리고 간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가난한 삶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감싸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슬퍼서, 실제 사건이 모티브이기에 지금 남편을 잃은 아내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프다. 가족을 위해 늦은 시간까지 일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던 아빠는 편히 눈을 감았을까.


"어려운데 왜 아기까지 낳느냐는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어. 내겐 희망이니까. 내겐 기적을 가져올 소중한 가족이니까. 우리 가족이 아니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참지 말아야 할 일들까지 견딜 수 있는 강한 내가 됐으니까." (63p)

사람을 믿은 우리가 비난받아야 할 일이 무어냐고. 믿었던 사람들을 배반한 그들이 잘못한 거 아니냐고. 초등학교 때 배운 그대로를 실천한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면박당해야 하냐고. 착하게 살라고 배워서 그렇게 살아온 게 잘못이냐고.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여기며 살아왔단 이유로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 불려야 하는 거냐고. 이용당한 나와 남편의 잘못이 아닌 이용한 그들의 잘못이 아니냐고.(148p)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시네."

(……)

"우리 엄마답네."

"아이들도 우리도 꼭 행복한 모습 보여달라시네."

"어른들이 원하는 게 뻔하지."

"해준 거 없이 행복하라고 해서 미안하다시네."

"부모니까. 미안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근심 없이 사는 거 보고 싶다 하시네."

"자식 걱정하는 부모들의 흔한 바람이지." (180p)

배운 게 없어 가난하다고 생각했던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앞만 달려보며 돈을 버는 것. 그래서 악착같이 벌어 아이들을 대학 보냈지만 자식들 또한 자기들처럼 일만 하며 살고 있다. 최소한의 여가생활도 누리지 못한 채.

누구도 독신으로 살라 말하지 않았지만, 독신을 고집해야만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앞날까지 계획할 정도의 여유 있는 삶은 진즉에 단념했다. 나 자신을 낮추고 위로 삼는 편이 훨씬 나았다. (200p)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곘어요. 만족할 뿐이지. 사소한 만족을 행복으로 포장할 뿐이지. 만족과 행복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말이거든요. 뜻도 다르고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로 포함시켜버리는 것에 익숙해 있잖아요.(21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야 자전적 소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매년 여름을 함께 하게 된 여섯 아이가 등장한다. 일단 아이가 넷이나 있는데도 이혼을 할 수 있는 용기(?)에 놀라웠고 부모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효과가 아이들에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셋인 입장에서 과연 다른 사람에게 반했다고 이혼을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드는 전형적인 보수적인 한국 여성이다. 옆집으로 이사 온 부부와 한 번의 키스의 효과는 엄청났다. 나비효과라고나 할까. 그 한 번의 키스로 인해 이혼을 했고 재혼을 했고 아이들은 의붓어머니, 아버지의 자녀들과 함께 하게 되었으며 비밀을 공유했고 멀어졌다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란 가정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책의 말미에 52세가 된 프래니가 잃거나 얻었던 것들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에 빚어낸 가정들을 보면 나이가 들어도 어릴 적 있었던 일은 지워지지 않는 무엇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캘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은 와해되었고 이후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지내다 프래디의 애인이 프래디의 어릴 적 이야기로 소설을 쓰게 되면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 모두 그랬을 거야.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스로는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내가 결국 깨달은 건 그거였어.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너와 앨비, 저넷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지는 못할 테니 그 사실을 붙들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372p

늘 맏이로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던 홀리는 스위스에서 명상을 하며 지내고 있다. 아마 어릴 적 부모님을 대신하여 자신의 동생과 의붓동생들을 챙겨야 했던 일에 대해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되었나 생각이 들었다. 캘러라인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저넷은 기니 출신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저넷의 남편이 앨비에게 '오늘 하루 어땠냐'는 질문에 앨비가 '청소를 하러 가는데 경비 아저씨가 두 번이나 자기를 막았다'는 말에 백인에게는 그런 것이 '어떤 일'이 될 수 있겠구나는 말에 씁쓸해졌다.) 방화를 저지르고 온갖 사고를 치던 앨비는 저넷의 집에 잠시 머물며 따뜻한 가정이라는 곳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해주는 일인지, 성인이 돼서야 그는 알게 된 것이다. 프래디는 문학을 좋아하나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로스쿨에 갔지만 자퇴를 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 리오 포즌과 함께 살며 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된다. 32살이나 많은 그는 아내가 이혼해 주지 않아 사실상 불륜을 하는 상태였고 32살이나 어린 프래디를 자신의 손님들을 대접하는 부엌데기 취급을 할 때 화가 났다. 앨비가 소설을 읽고 찾아와 프래디를 데리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내 속이 통쾌했다. 프래디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힘들게 살았던 그 시절 신세를 졌던 친구와 다시 만나 사랑받는 것을 보고 결국 모두 행복한 길을 걷게 되어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커먼웰스는 미국의 켄터키,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네 개 주를 통칭하는 단어라고 한다. 내겐 낯설지만 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대략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생각과 다르게 나타날 때가 많다. 이 소설은 작은 결정 하나가 두 가족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흔들어 놓았는지 알 수 있다. 앤 패칫의 어머니가 아이가 넷인 남자와 재혼하게 되면서 앳 패칫은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느낀 감정은 비슷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더 마음이 아팠다. 늘 죄책감과 비밀을 갖고 어떤 때는 세상에 반항하고 싶고, 어떤 때는 세상 끄트머리에 숨어 살고 싶으면서, 어떤 때는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해 상상하면서 말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어른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조금 정신없었지만 자식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내려갔다. 보통 자전적 소설을 첫 작품으로 내놓는다고 하는데 그녀는 일곱 번째로 내놓았다. 그만큼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무덤덤하고 시크한 문체로 써 내려갔지만 이제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볼 용기가 생겨 세상에 내놓았을까 마음대로 상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