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힘든 일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방어기제에는 성숙한 방어기제와 미성숙한 방어기제가 있다. 자신의 좋지 않은 경험을 가치 있는 일로 풀어내는 '승화'는 성숙한 방어기제로 꼽힌다. 예술가들이 질병이 주는 고통과 개인적인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가상의 미술치료사 '닥터 소울' 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예술가들에게 심리 상담을 해 주면서 기록한 상담 일지 형식이다. '닥터 소울'은 미술치료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의 경력을 반영한 캐릭터다. 작품이 나온 시대적 배경이나 예술가에 대해서 모르는 채로 작품만 보면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보고 넘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상담 일지 형식으로 예술가의 인생을 접하니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작품들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도 알 수 있어서 작품을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뉴스에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이탈리아 여자 화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젠틸레스키는 18살 때 미술 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강력한 후원자를 둔 가해자가 소위 말하는 '빽'을 써서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 반면 피해자인 젠틸레스키는 부정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이 일이 일어난 다음에 젠틸레스키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유디트가 저신을 성적으로 유린하려고 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박력 있게 베어버리는 장면을 담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그렸다. 여기서 유디트의 얼굴에는 자신의 얼굴을,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는 성폭행범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제가 이 유디트처럼 남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저를 그렇게 바닥까지 추락시켰던 남자들한테... 목을 벨 수은 없겠지만 매일 밤 울면서 마음속으로 죽이고 또 죽이는 상상을 했어요."

"이렇게라도 그리지 않았으면 속이 타서 죽지 않았을까 싶어요. ... 그림으로라도 이렇게 복수를 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당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만약 이런 배경을 모르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그냥 봤다면 단순히 '옛날 그림이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가?'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화가가 자칫하면 마음이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림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인생에서 좋은 일만 일어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잊고 싶은 일들도 꽤 많이 일어난다. 예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풀어낸 아픔에 공감하고, 아픔이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나도 더 건강한 방법으로 나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듬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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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프라도 차오, 빌바오 - 유쾌한 스페인 미술관 여행
최상운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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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야기와 그림을 좋아한다. 둘 모두를 담은 책이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미술여행작가의 관점으로 미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라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특히 스페인 미술사 책이라는 점이 마음을 잡아끌었다. 잘 몰랐던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좀더 알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스페인 미술사를 시간 순서대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대신 스페인에서 저자가 방문했던 장소에 있는 작품 하나하나의 특색을 설명해 준다.

책의 첫 장인 ‘프라도 미술관 기행’에는 후안 산체스 코탄이 그린 ‘정물화’라는 그림이 나온다. 배추, 사과, 레몬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는 정물화다. 처음 봤을 때는 뭐지? 왜 그린 거지?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저자는 이 그림에 나오는 과일과 채소들이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먹음직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지만 순간적인 쾌락을 줄 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 부분을 읽고 나니 휙 보고 지나쳐버렸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품 설명을 읽기 전에 본 그림과 읽은 다음에 본 그림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설명을 읽고 나서 새로운 느낌을 즐기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읽다 보면 스페인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궁전들을 주로 다루는 ‘그라나다 기행’과 ‘세비야 기행’에서는 이슬람 왕조와 기독교 왕조의 지배가 그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볼 수 있다. 세비야에 있는 세비야 대성당은 원래 이슬람 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모스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기독교 왕조가 이슬람 왕조를 몰아내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그래서 안달루시아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섞인 ‘무데하르 양식’의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으면서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심층적인 지식을 얻으려면 작정하고 공부해야겠지만 입문서로 삼기에는 이 책도 좋다고 생각한다. 미술과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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