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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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이후 절필을 선언하신 후 현재도 투병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해마다 읽고 싶은 나의 도서목록리스트에 어김없이 적혀있긴 했으나, 개인적인 취향이 단편보다는 장편에 눈이 더 가는 터라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매번 지나치곤 했었다. 이번에 출판사 '더클래식'에서 한국문학 컬렉션시리즈를 출간하는데 그 첫번째 책으로 <무진기행>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올해 탄생 80주년을 맞은 그의 기념 출간이기도 한 이 책을 드디어 읽을 기회를 얻어 감개무량함 마저 들게 했다.

20여편이 조금 넘는 작품만으로도 한국 작가들의 스승이자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김승옥 작가님의 이 책 <무진기행>은 그의 모든 중단편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 12편을 수록해두었다. 전후시대를 살아온 작가가 근대화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과거소설에서 흔히 보였던 인물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었다. <무진기행>, <생명연습>, <역사>,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해 살고 있지만 기존 소설에서 흔히 보였던 고향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을 그려내기 보다는 부끄럽고 어려웠던 고향에서의 과거를 회상하고 벗어나 도시에서 정착하게 된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자각하는 모습들을 그려나가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수많은 주제들 중에서 이 책의 대부분의 소설 역시 '사랑'이라는 주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휴가차 내려온 무진에서 한 여인을 만나지만 인사도 없이 서울로 향하게 되는 <무진기행>, 자신이 사랑하는 윤희누나를 형이 겁탈하는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 <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겁탈하고 떠나게 되는 교수님의 사랑방식을 얘기하는 <생명연습>, 하숙집 주인 딸 숙이에 대한 감정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다산성>, 그리고 유명탤런트와의 사랑와 이별을 이야기한 <서울의 달빛 0장> 등 대부분이 사랑에 대한 비틀린 상실감이 그려져있었다. 근대화과정에서의 유교적인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삶의 방식이 현재와는 상당히 많이 변화되고 달라져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는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는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무진기행>중에서 p.42

고결하고 단아함의 결정체였던 어머니가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주는 충격으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 형과 함께 어머니 살해를 모의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다룬 <생명연습>에서도 그렇지만 한 개인의 내면을 특이한 언어로 형상화하는 가장 특징을 보여준 작품이 바로 <다산성>에서 였다. 작가 최초로 중편소설이면서 각각의 개인과 주체, 자아의 문제들이 하나의 사건과 연결지어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언어적 유희를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우리 열명이라는 밀가루는 반죽이 되면, 엉뚱하게도 찐빵이 된다. 하나하나가 지고 있는 분위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그들이 모였을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조용한 밀가루들은 떠들썩한 찐빵이 되는 것이다.

<다산성>중에서 p.299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로 시작되는 <염소는 힘이 세다>, 반드시 실패했어야 할 자신의 적으로 얘기한 <그와 나>, 부잣집으로 하숙을 옮기게 되면서 그의 가족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역사>, 해고하면서도 차나 한잔하자고 권하게 되는 문화를 꼬집어 주는 <차나한잔>,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등도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부리워지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작가만의 언어유희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벽은 벽인 동시에 정사각형이 아닐까? 나는 인간인 동시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곡선의 평면이다. 마티스의 저 여인들처럼, 화려한 풍경 속에서 창백한 백지로 남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어떤 하얀 평면. 고은 커튼을 드리워놓고 싱싱한 화초를 가꾸어 놓고 하늘이 엿보이는 유리창을 달아놓은 그러한 방 속에서 그러나 그 그 모든 것을 설치해 놓은 여인은 텅빈 백지. 동그라미를 저 벽에 붙이러 일어나보자, 할 수 있겠지? 자아, 내게 가장 귀한 고정관념으로써.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중에서 p.294-295

12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1960년 전후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과 고뇌 그리고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으며, 쓸쓸하고 고독한 자아와 내면의 모습이 불안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시 사람들의 상실감과 일탈들로 이어져 아름답고 화려한 작가 특유의 언어들로 표현되어 만날수 있었다. 올해 읽어야할 책을 읽어낸 과제를 마친 기분이 아니라 여지껏 읽지 못하고 있었던 그의 작품을 이렇게 늦게 만나게 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늦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화려한 미사어구의 감탄과 존경에 대한 격한 공감을 할 수 있었던 의미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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