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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찰스 부코스키 지음, 공민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란 제목이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져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표지에서의 정제되지 않은 모습의 늙은 노인이 담배하나를 삐딱하게 꼬나물고 뭔가 불만이 가득한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에서 삶의 고뇌와 번민이 머리 속에 떠오르며 그려졌다. 그래서 책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이 작품을 만났다.
이 책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거센 비난을 받으며 미국 주류문학의 이단이이자 아웃사이더로 불리우는 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이다. 평생 60여편이 넘는 시, 소설, 산문, 시나리오를 썼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예술가들의 예술가이면서, 문단에서는 비주류로 각종 비난을 받아왔을지언정 미국 서점에서는 정작 가장 많이 도난당난 작가이자 전세계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으로 추종되는 인기작가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얻었다고 한다. 이 책은 1969년 존 브라이언이 창간한 지하신문 <오픈 시티>에 14개월 동안 연재한 칼럼을 엮은 산문집으로 술에 취해 내뱉는 음탕하고 거친 언어 뒤에 숨은 깊은 사유, 밑바닥을 전전하며 깨닫는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어느 작가에서도 볼수 없는 유머와 재치를 겸비한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찰스 부코스키식 글쓰기의 진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처음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다소 난해하고 황당하다 였다. 매일 술에 취해있고 수많은 여자들과의 자유분방한 관계들과 그들과 내뱉는 퇴폐적인 언어들, 서민들의 삶이라고도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하류민들의 처참한 일상들의 표현들은 절로 인상이 쓰여졌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표현들은 신경이 거슬릴 정도였으니 그가 작품마다 거센 비난을 받고 주류문학의 이단아이자 아웃사이더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문장의 표현만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들을 가만히 숨죽여 들여다보면 삶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그와 그 주변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회의 차가운 현실세계에 냉정한 관찰과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이면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최근에 지성인을 너무 많이 봐왔다. 입을 열 때마다 주옥같은 말을 내뱉는 소중한 지성인들에게 진짜 신물이 났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속으로 계속 숨 쉴 자리를 만드는 데 이골이 난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떨어져 지냈으며 지금 사람을 만나보고 다시 내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p.40)
- 지성인이란 단순한 것을 어렵게 말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란 어려운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p.245)
- 누군가는 혁명을 꿈꾸지만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도 자신의 새 정부가 여전히 기존의 정부와 같고 기존의 정부도 마분지를 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p.90)
- 알겠지만 혁명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물론 그렇지 않다. 피와 창자와 광기만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는 건 청년들이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 못하는 것도 청년들이다. (p.93)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경마장의 말들을 통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 어쩌면 다음번에 우리가 1위 말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연습과 약간의 웃음 그리고 운이 조금 필요하다.(p. 65)
또한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도 오묘하지만 매력적이게 들렸다.
- 어머니가 자네를 사랑했나?/자신의 연장선상으로서만 그랬습니다.
그것 말고 사랑이 또 뭐 뭐가 있겠어?/아주 좋은 무언가를 아주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것입니다. 꼭 인간관계일 필요가 없습니다. 빨간색 비치볼이나 버터 바른 토스트도 될 수 있습니다.
자네 말은 버터 바른 토스토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일부는 그렇습니다. 어떤 날 아침에, 어떤 햇살이 들어 올 때 말입니다. 사랑이 찾아오고 말없이 떠납니다.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나?/물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잘 모른다면 말입니다. (p.262-263)
작가가 자주 말하는 40대후반과 50대를 향해 가는 나이대를 '냉동인간상태'라 불렀는데 나 역시 점점 더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궁금해하거나 세심하게 살피기보다는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더 좋아하는 걸 보니 점점 냉동인간상태인 그 시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며 일정부분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처음 읽을 때 다소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읽어내려 갈수록 인간의 기본본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1960년대라 다소 현재와는 괴리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현실세계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하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가볍게 읽으면 한없이 가벼울 수 있고, 또 그 이면을 들여다보며 읽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주제의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