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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이 (특별판) ㅣ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8월
평점 :

넉넉하지 못한 살림의 딸부잣집이었던 우리집에 막둥이가 아들로 태어나자 남존여비사상을 철저히 실천하신 할머니 그늘에서 우리 자매들은 더 똘똘 뭉치며 의지하며 자랐고, 세월이 흘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막내로선 몰랐던 언니들의 삶의 무게들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때는 지지리도 가난했었고 그로 인해 여자로서도 그리고 맏이로서도 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강요받으며 자랐던 당시 언니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 <깡깡이>는 흘러간 시간 속에 잊혀져가는 우리 엄마와 언니들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깡깡이>는 신춘문예로 등단해 황금도깨비상, 5.18문학상, 부산아동문학상, 동서문학작가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으로 필력을 인정받은 한정기 작가님의 책이다. '깡깡이'란 선박을 새로 페인트칠을 하거나 수리할 때 녹이 슨 배의 표면을 작은 쇠망치로 쇠철판을 두들리때 나는 야물고 단단한 소리를 일컫는 말로, 70년대 부산의 대평동 조선소에서 당시 이 일을 하는 여자들을 '깡깡이 아지매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임에도 이 일을 통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식구들을 먹여살렸던 자긍심이 묻어있는 이야기인 <깡깡이>는 아홉살에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가 경제개발이 한창일때 사춘기였던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로 재탄생한 이야기라고 소개되고 있다.
이 책 <깡깡이>는 현재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를 둔 맏딸 정은이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책의 속지 색깔을 흰색과 회색으로 달리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작은 화물선의 선장이신 아버지가 사고로 벌금형을 구형받아 직장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집을 나간채 소식이 끊기고 다섯남매를 둔 어머니는 깡깡이로 취업을 하지만 아버지 벌금으로 준 빚갚느라 생활은 어렵기만 하다. 결국 맏딸인 정은이는 중학교를 포기하고 엄마대신 가족들을 대신해 집안일을 떠맡게 된다.
- 장남은 챙기면서 장녀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아니다! "우리 집 살림 밑천 기특한 맏딸!" 아버지의 그 말은 나를 옥죄는 족새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말에 꼼짝없이 묶여 기특한 딸이 되어야 했다. 칭찬은 좋은 면만 있는게 아니었다. (p.16)
장녀로서의 책임감을 고스란히 감당했을 그녀는 고작 초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세상에 대해 스스로도 놀랄만큼 냉철하게 깨우치게 된다.
- 나는 세상의 모든 일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감정의 질척한 구덩이에 들어가 함께 뒹구는건 이제 사절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최대한 객관화시켜 바라보면 문제의 확실성이 놀랄만큼 명료해졌다.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세월을 나는 맏딸이라는 책임감에 눌려 살아야 했다. (p.28)
엄마가 치매가 걸려 결혼하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역시 모두 과거의 힘든 세월을 잊고 젊은 시절의 감성적이면서 부드럽게 볼 수 있는 여자로서 삶을 그리기 위한 모습으로 보여 인상적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노동을 하는 가장으로서의 엄마를 지켜보는 주인공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물론 남자라는 인간 전체를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가게 만드는 모습은 엄마와 주인공 정은이 모두에게 애잔함이 들게했다.
- 깡깡이 아지매들은 자신들의 삶에 녹처럼 붙어있는 가난을 떨어내듯 안간힘을 다해 망치질을 했다. (p.47)
그리고는 결국 자신은 맏딸이라는 책임감에서 묶여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 맏딸이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자 엄마도 동생들도 비로소 한사람의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이해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생각은 사람의 은신을 얼마나 좁게 만드는지. 내가 자유로우니 동생과 엄마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p. 167)
과거도 현재도 우리의 역사이다. 시간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흐르고 흘러 하루하루를 만들어간다. 작가의 말처럼 이 이야기는 흘러간 우리의 소중했던 어느 한 시절의 작은 단편이다. 누구에게는 가슴 아플수도 누구에게는 추억할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 시절의 힘들었던 시간은 지금의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모두 같은 과거일 수는 없지만 울고 싶을 때는 울음소리로, 기쁠 때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던 '깡깡이' 소리와 같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서 과거의 추억거리가 존재할거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 모두의 가슴 한켠에 '깡깡이'같은 희망에 가득차 지르는 함성소리가 들리길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