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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5.18이 가까워오고 있다. 매년 5월이 되면 누구보다 선봉에 서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과 요구에 목소리를 높이며 비판하고 저항했던 이들의 삶과 투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난 100여년간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고,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내가 선택한 책은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과 투쟁이 담긴 이야기, <달뜨기 마을>이다.
작가 안재성씨는 <파업>이라는 장편으로 제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서민대중의 권익을 찾아주는 이야기에 흥미와 감동을 느끼며, 또 그러한 이야기들을 주로 써오고 있다. 전태일 50주기 기념으로 출간된 <달뜨기 마을>은 지난 2년간 시사월간지 <시대>에 연재되었던 민초들의 삶과 투쟁을 담은 단편소설 총 9편을 묶은 책이다. 본인이나 유족에게서 직접 들은 증언을 토대로 가독성과 익명성을 위해 약간만 각색했을 뿐 등장인물과 사건의 줄거리는 모두 실제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라고 하니 읽으면 읽을수록 더 놀라울 따름이다.
총 3부로 나눠진 이 책, 제1부에서는 해방직후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상적 이념을 주로 다룬 소설 <이천의 모스크바>, <두 발 자전거>, <달뜨기 마을> 세 편이 실려있다. 제2부에서는 지극히 평범했던 아이가 불평등과 부조리에 맞서 노동운동과 민주운동을 하게 되며 겪게되는 <첫사랑 순희를 찾아서>, <팬데믹의 날>, <37년만에 맞춘 퍼즐>이, 그리고 마지막 제3부에서는 용역깡패에 맞서 싸워 이야기를 다룬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비정규직 철폐 운동을 다룬 <스무 명의 성난 여자들>, 캐디 인식과 이미지 개선을 위해 단체협약에 가입해 당당히 맞서 싸워가는 <캐디라 불러주세요>가 담겨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요구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불평등과 불합리함에 맞써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는 자신을 저토록 희생해도 될 가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융통성이 없어 답답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노고에 감사함을 지나 숙연함마저 들게 했다. 책을 읽은 내내 답답함과 억울함이 들게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아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식에 대한 마음가짐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천의 60호구 마을 중 기독교 집 두집을 제외하곤 모두 공산주의라 지어진 마을이름 '이천의 모스크바'도 공감이 갔고, 다리 밑에 버리고 간 자신을 엿장수딸이라 믿고 서당에 남장을 시켜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이정현씨 이야기도 과거 어릴 적 내면의 순수함을 상기시키게 했다.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도 죽음을 당했지만, 자신 역시도 남편처럼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았던 한연희씨의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첫사랑 순희씨와 40년만의 재회이야기도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람이 무섭고, 항상 불안한 코로나19를 5.18 그날과 닮은 모습으로 비춘 이야기엔 요즘의 우리의 안타까운 상황이 겹쳐져 많이 다르게 느껴졌음에도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노조탄압과 노조파괴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행중인 일이고, 비정규직 전환이나 직업인식에 대한 이미지 역시 여전히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보인다.
지난간 역사는 되돌아오지 않지만, 잘못된 역사는 되돌아오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항상 노력해야 한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의 책을 읽을 때면 너무도 안타깝고 매번 울분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투쟁과 노력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철저히 준비해 나간다면, 아픈 역사였으나 이를 통해 진정한 가치로 빛이 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시간이었다.
책에서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은 기록해둔다.
- 도대체 빨갱이가 뭐가 문제라는 거야? 골고루 잘 먹고 잘 사는 게 뭐가 나빠? (p.39 '이천의 모스크바' 중)
- 1930년 새해가 왔을 때,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행 기차를 탔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는 21살짜리 겁없는 처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날라다주는 또 다른 두발자전거였다. (p. 50 - '두발자전거' 중에서)
- 달뜨기는 나룻배 모양의 타원형 분지에 십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작고 아늑한 마을이었다. 봄날 맑은 밤이면 찰랑찰랑한 논물 위로 두둥실 떠가는 달이 꿈같이 아름답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그곳을 달뜨기 마을이라 부르고 한자로는 개월이라 썼다. (p.70 - '달뜨기 마을' 중에서)
- 여러분 귀청을 찢는 저 총소리가 들립니까? 살인집단 공수부대가 도청을 사수하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광주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될 겁니다. (p.162 - '팬데믹의 날' 중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한 윤상원씨 이야기)
- 사람들은 보통 시계의 시침만 봅니다. 밖에서는 시침이 굴러가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계 안의 기어가 굴러가는 것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도 그렇습니다. (p.246 -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