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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
천양희 외 지음 / 북카라반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사회적 거리두기가 두 달째 시행중이지만, 아파트 앞 마당에도 동네 앞 공원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꽃잎이 비를 내리듯 흩뿌리고 있다. 떨어지는 꽃비에 마음이 뽀송뽀송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감수성 가득한 10대 소녀로 돌아가 시집을 꺼내들게 된다. 오늘 내게 선택된 시집은 천양희, 신달자, 문정희, 강은교, 나희덕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여류시인들의 75편의 시가 실린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이다. 두꺼운 하드커버로 사실 봄에 나온 시집이지만 표지는 코로나가 끝난 평화로운 여름이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담겨져 있어 보이는 건 순전히 내 바람이기도 하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은 바닷가 근처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내 추억과 함께 어우러져 온전히 지금의 나로 비춰져 진한 쓸쓸함이 묻어나 보인다.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는 우리 일상의 삶이 그대로 시로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수한 소녀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아내로서, 다정한 엄마로서의 모습,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도 담겨있는데다, 우리가 매일 보고 느끼는 자연의 모습들도 다양한 정서로 담아냈다. 시는 담긴 음률, 리듬, 하모니의 음악적 요소와 이미지와 시각을 형상화하게 되는 회화적 요소들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내면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하듯 이 책의 시 한편 한편이 모두 잔잔한 내 마음에 작은 울림을 주며 추억을 회상하게도 하고, 현실을 노래하고 있기도하고, 미래를 상상하게도 했다.
천양희 시인의 <너에게 부침>과 <웃는 울음>은 삶이 가끔씩 버겁게 느껴지는 현실의 내 모습이 비춰져 보였고, 신달자 시인의 <심장이여! 너는 노을>과 문정희 시인의 <유리창을 닦으며>에서 사물을 대하는 놀라운 표현력 자체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 두 시인의 <봄의 금기사항>, <백치슬픔>, <비망록>, <찔레>에서 사랑을 대하는 표현이나 방식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시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강은교 시인의 <숲>과 <너를 사랑한다>는 읽고 나서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나희덕 시인의 <푸른밤>, <천장호에서>, <산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이었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긴 한데 시를 읽고 나면 한참을 멍하니 시집 속 구절을 떠올리며 책을 꼭 껴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를 통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시를 통해 나를 위로 받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나는 어느새 시를 통해 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가끔씩 삶에게서 위안을 받고 싶거나 공감을 얻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해본다. 제목에서처럼 그녀는 물론 당신과 나의 푸른 날들을 기대해보면서 말이다.
공감되는 구절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 천양희
<너에게 부침> p. 28
삶이 몸살같다/항상 내가 세상에서 앙탈을 해본다./병주고 약주고 하지말라고/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웃는 울음> p. 32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은데도 울 곳이 없어/ 물 틀어 놓고 물처럼 울던 때/ 물을 제치고 물결처럼 흘러간 울음소리/ 물소리만 내도 흐느낄 울음은 유일한 나의 방패/ 아직도 누가 평행선에서 서 있다면/서로 실컷 울지 못한 탓이다
** 신달자
<심장이여! 너는 노을> p. 54
저녁이 노을을 데리고 왔다/ 환희에 가까운 심장이 짜릿한 밀애처럼/느린 춤사위로 왔다/나는 그와 심장을 나눈 사이
<봄의 금기 사항> p.56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그저 마음 깊은 사랑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백치슬픔> p. 74
사랑하면서/슬픔을 배웠다/사랑하는 그 순간부터/사랑보다 더 크게/내 안에 자리잡은/슬픔을배웠다....나는 너와 이별하고 싶다
**문정희
<비망록> p. 82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
<유리창을 닦으며> p. 93
누군가 그리운 날은/창을 닦아서/맑고 투명한 햇살에/그리움을 말린다
**강은교
<숲> p.123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나무 하나가 흔들리면/나무 둘도 흔들린다/나무 둘이 흔들리면/나무 셋도 흔들린다/이렇게 이렇게
<너를 사랑한다>p.136
그땐 몰랐다/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너를 사랑한다.
** 나희덕
<천장호에서>p.167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헛되이 던진 돌멩이들/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산 속에서> p.175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
먼 곳의 불빛은/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