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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 / 메이븐 / 2020년 4월
평점 :

무신론자인 내가 이번에 읽으려고 선택한 책은 카톨릭신부이자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로버트 휴 벤슨이 쓴 <세상의 주인>이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은 물론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두 번이나 추천한 장편소설로 <1984>, <멋진 신세계>,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걸작품이라는 소개글이 우선 나의 시선을 끌었고, 1907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이번에 한국어로는 최초로 번역 출판된데다가, 유토피아가 아닌 암울하고 부정적인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장르의 시초가 된 소설이라고 하니, 카톨릭의 관점으로 보는 종말론을 과연 어떻게 그려냈을까 하는 의문점과 아울러 종교론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비관론적으로 이끌어갈지가 너무도 궁금하기도 했다.
이 책 <세상의 주인>은 반그리스도교 세력이 세계정부의 권력을 잡으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국국교회는 몰락하고 군주제와 대학도 무너졌다. 개신교도 죽고 카톨릭교회도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고, 공산주의 체제가 중심이 되어 인본주의, 물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 정부를 만들었으며 그 중심부에는 미지의 인물 줄리언 펠센버그가 존재한다. 그런 줄리언 펠센버그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외모를 지닌 웨스터민스트의 대주교 퍼시 플랭클린은 펠센버그의 로마 교황청 볼러 공격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3인 중 하나가 되어 다음 교황으로 추대받으며 힘겹게 카톨릭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영국의 초선의원 올리버 브랜드, 그의 아내 메이블, 그리고 그의 어머니 브랜든 노부인, 이들 가족이 종교적인 믿음과 정치적인 권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110년 전 쓰여진 소설이지만, 소설 속 배경과 인물들은 현재와 많이 닮아 보였다. 기술혁신과 산업발달로 볼러처럼 편리한 공격용 비행선이 등장하고 자신도 모르게 노출되는 자신의 정보들은 현대 과학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들이 역시 우리들의 고민과 일치한다. 인간이 중심인 인본주의가 우선시 되지만, 권력의 힘으로 공익을 앞세우면 인간의 목숨도 쉽게 좌지우지되고, 겉으로는 공평한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지만 결국 1인 독재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모순적인 상황은 결국 세계인들을 사상적 획일화내지 사상적 식민화로 이끌어가는 결론을 이르게 했으니 생각만으로도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또한 병의 유무에 상관없이 안락사가 인정되어 자신의 죽음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소설 속 상황은 종교인으로 당시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올리버 본인은 악으로 물든 사상적 세계화의 노예로, 메이블은 개인의 권리가 사라지고 세상의 희망이 아니라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로 펠센버그를 제대로 보게 되면서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의 어머니 브랜드 노부인은 영성체와 죽음이 임박해져 병자성사까지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며 작가는 그 올리버 가족을 통해 그리스도적 정신이 입각한 종교적 신념을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게 되었다.
사실 디스토리아 소설이라는 것을 도입부분 소개를 읽어서 알았음에도 결론이 너무도 파격적이었던지라 읽고 나서 한참을 멍해져 있었다. 카톨릭신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