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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선정함에 있어서 수상작이 주는 매력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인지라 사실 책 표지의 '일본 3대 문학상을 휩쓴 무라타 사이카', '또 한번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서 성과 욕망을 그려내다'라는 소개글, 그리고 몇 해전 신경숙 작가가 그의 작품 표절로 시끄럽게 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힐리니즘을 표방하는 탐미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상 수상작이라는 제목에 매혹되어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재개발이 한창인 초4메 마을에서 유카라는 이쁘지도 않고 지극히 평범한 친구가 철저히 자신의 눈으로 초등학교거쳐 중학교 시절을 보내며 겪고 느끼게 되는 학교생활과 첫사랑에 대한 내면의 격정적인 감정을 그려놓은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과의 관계와는 달리 중학생이 되면서 학교 내에는 소위 이쁘고 잘나가는 상위그룹부터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는 바닥그룹까지 철저히 계급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유카는 초등학교 때 친했던 바닥그룹의 친구인 노부코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말도 하지 않으며 철저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상그룹의 눈치 아닌 눈치를 봐가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학교생활을 한다. 유카는 매번 자신의 몸에 냉혹하게 점수를 매기며 잔인한 현실에 한숨을 쉬면서 거기이 속한 그룹에 맞춰 행동하며 학교생활을 하고있다. 한편 초등학교때 서예교실에서 만난 키작고 밝은 성격의 이부키와 호기심으로 시작한 키스로 유타는 그를 자신의 '장난감'으로 명명하지만, 중학생이 되자 근육질의 축구부 부주장인 이부키는 전교생이 다 아는 유명인이 되어 남학생 상위그룹에 속하게 되고 정작 학교에서는 아는 척도 못하는 사이가 되면서, 그런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간다. 이부키가 사귀자고 하지만 그를 향한 그녀의 진심은 말도 못하고 숨긴채 그에 대한 그녀의 행동은 전혀 예상과는 반대의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나게 되고 둘은 소원해진다. 이후 유카는 바닥그룹 친구 노부코가 변해가는 당당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고 자신도 변화를 꿈꾸기 시작한다.
작품상 자체가 허무주의와 이상심리를 다룬 작가의 상인지라 그와 비슷한 소재의 작품일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주인공의 연령이 초등에서 시작해 기껏해야 중학교 시절의 사랑을 담고 있는터라 일반적인 첫사랑의 풋풋하고 가슴설레이는 핑크빛 기류의 사랑이야기일거라는 기대했었다. 아니면 초반 설정이 초등시절의 기억에서 시작된터라 이후 성인이 된 유카와 이부키의 사랑이야기일거라는 기대를 내심 했지만 내 기대는 처참히 빗나갔다. 사실 단순히 연애감정인지 종속관계인지 불분명한 그들의 관계 사이에 일어나는 상황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본인의 가치관대로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당당히 고백으로 용기있게 끌어내는 모습에서는 잠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키스가 장난감으로 변질되어 지속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는 장면들은 사회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삐뚤어진 어른들의 성의식에 일침을 가해주는 장면인듯해 읽는 내내 씁쓸했다. 또한 초등학교때 친했던 친구들이 각각 상위그룹과 바닥그룹에 나뉘어져 자신의 위치에서 갈등하며 어쩔 수 없이 상위그룹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잘 지내고자 하는 모습은 비단 학교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철저히 강자 약자의 그룹으로 나눠 학교라는 사회를 바라보는 10대소녀의 시각을 보고 있자니 어른인 나로서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더불어 미래를 남몰래 경멸하며 그 사실에 왠지 자신을 특별한 여자애인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는 유카의 말을 들으며, 그녀를 좀 더 환하고 밝은 곳으로 인도해 줄 이부키가 있었기에 그나마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줄 힘을 낼 수 있었고, 암울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 속에서 마을이 재개발된다는 기대와 함께 그들 이야기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찾아낼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한번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했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표현들을 남겨본다.
- 나는 이 감옥같은 학교 저 위에서 모든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 착각에 빠질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에서 누군가를 관찰하는 건, 나에게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누구보다 현명하고 올바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내 얼굴에 얼마나 낮은 점수가 매겨졌는지, 이 순간 만큼은 잊을수 있었다. 그러면 늘 갑갑하고 괴로운 이 상태에서 벗어나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것 같았다. (p.178)
- 이부키의 좋아하는 마음은 나와 전혀 다르다. 나처럼 발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아니고, 광기어린 독점욕을 퍼뜨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올바른 '좋아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중략)....나는 이부키의 올바름이 두려웠다. 그 올바름이 현기증 날 정도로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이부키가 급이 낮은 아이라면 좋을텐데. (p.257)
- 괴로운 건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숨이 멎으면 편해질 수 있다. 시야를 뒤덮은 하얀색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이미 호흡이 멎은 듯한 기분이었다. 무리하게 숨 쉬기보다 이곳에서 하얀 벽을 올려다보며 숨이 끊어지는게 더 편안할 것 같다. (p.274)
- '무'란 이런 것일까. 하얀 벽을 보며 생각했었다. 감옥 안은 이런 광경일지도 모른다. 창문도 없는 거대한 벽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데도 갈 수 없다. 완전히 멎어버린 고요한 공터에는 풀잎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흐로고 있었다. (p.275)
- 내가 제일 싫었던 건, 네가 그걸 꾹 억누르며 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쏟아내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네가 나보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기에게 상처를 줬어. 난 네가 좋아하는 너하고 그런 걸 하고 싶었어. (p.365 이부키가 유카 고백 받은 후 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