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http://blog.yes24.com/document/8052940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http://blog.yes24.com/document/8543840
다산북스 나나흰 활동을 이어오면서 재기발랄한 북유럽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을 세 권째 읽고 있다. 옮긴이 후기에 나오듯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서 특별한 이유와 경험 때문에 '까칠한 성격'을 장착하게 된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아, 문제옹'도 잘 들여다보면 사실 그런 까칠한 언행을 갖게 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문제 의식이 세 소설을 공통으로 관통하고 있다.
이번 신작은 전작 "할미전"에서 까칠한 이웃들로 나왔던 브릿마리와 켄트 부부의 이야기를 깊이 들려주고 있다. "할미전"을 읽을 때는 저런 이웃이
있으면 짜증나겠다 싶었는데 "브릿마리 여기 있다"를 읽고 나니 과연 전작 주인공들보다 브릿마리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나흰 덕분에 평범한 소시민이 영웅이 되는 통쾌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할.미.전"에서 엘사와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 중에서 가장 밥맛이었던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물으면
1위가 켄트, 2위가 바로 브릿마리였기 때문이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말로는 아무 편견이 없다면서 사실은 온갖 편견으로 똘똘 뭉쳤고,
잔소리꾼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청소에 강박증을 보이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브릿마리가 취직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성벽처럼 단단하게 브릿마리를 차단하고 있던 내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크만의 작품에서 아무 이유 없이 까칠한 사람은 없었다. 오베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고, 엘사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고, 브릿마리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어쩌면 배크만은 지금껏 나이가 너무 많아서 또는 너무 적어서 그것도 아니면 너무 특이해서 발언권 없이 함구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 세상의 주변인들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세상과의 소통에 서툴러서 온갖 오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476-477쪽.
"그를 안아주고 싶지만 브릿마리는 지각이 있는 사람이다. 교도관들은 면회 시간이 아니라서 벤이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했지만 스벤이 누차 설득한 끝에 편지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한다. 교도관들이
서명을 받아서 들고 온다. 서명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한다!""
224-225쪽.
수 십 년 간 집에서 살림만 하던 브릿마리는 바람핀 남편과 집으로부터 떠나 자립을 연습하기로 한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아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와중에 겨우 구한 일자리는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때문에 몰락한 시골 마을 보르그에 방치된 레크리에이션 센터 관리직이다. 거기서 축구장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하는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을 알게 되고, 브릿마리가 거기 있음을 통해 마을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맞는다.
* 브릿마리에 대한 공감
올해 업무분장희망원과는 전혀 상관 없이 환경봉사 업무를 점지 받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시종일관 청소, 계획,
도덕, 이성, 완벽에 집착하며 끈질기고 까칠한 브릿마리를 보며 공감 내지는 연민이 들었던 이유는 그가 나와 너무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학교에서 제일 까칠한 사람이라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나도 브릿마리처럼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꾼
프레드릭 배크만은 개그 프로그램에서 반복해서 유머 코드를 만들어내듯 책 전체에 걸쳐 아래와 같은 문체로 브릿마리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는 마음
속에 드는 충동을 이성으로 자제하려는 자세, 예의에 어긋나거나 정의롭지 않은 언행이나 상황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는 자세를 보인다. 한편 수첩을
들고 다니며 리스트를 적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무엇보다 언니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자신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청소 강박을 해소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모습은 안쓰러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바깥 복도에서 공 두 개를 굴리며 차고 있다. 브릿마리는 달려 나가 실내에서 공을
차는 게 얼마나 부적절한 행동인지 엄하게 나무라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녀가 보기엔 실내 경기장 자체가 부적절한
발상이지만 자기가 오히려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기에 함구한다." 368쪽.
* 마을공동체, 사회 참여
""한 아이를 키우려면 그 뭣이냐, 온 마을이 필요하다잖아요? 여기 우리 마을이 있어요!"" 456쪽.
커트러리를 깔끔하기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나쁠 리가 없다고 브릿마리가 단언했던 새미(베가의 오빠, 오마르의 형)는 착하게도 결국 친구
사이코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베가와 오마르는 사회복지사를 통해 다른 보호자에게 넘겨질 상황에 처하는데
브릿마리를 비롯,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와 같은 대사를 치며 자신이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브릿마리가 코치가 되어준 덕분에
아이들이 축구 대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마을이 변화 계기를 맞는데, 마을에 변변한 축구장 하나 없다는 사실에 분개한 브릿마리는 남편 켄트와 함께
관련자들을 찾아가 1주일 넘게 끈질기게 축구장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북유럽 시민 참여 분위기를 배우고 싶어하는 책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에 나오는 듯한 가까운 미래 민주시민이 가져야할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브릿마리는 원하는 바를 (사람에게 핸드백을 휘두르며)
직설적으로 요구하는 반면, 켄트는 매우 정치적이게도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투표권자인 마을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은 척하기, 여러 이익
단체와 시민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는 척하기, 로비 및 수십 통 전화 걸어 요구하기 등)으로 접근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책 전체는 브릿마리가 사회
참여하게 되는 과정과 마을공동체를 깊이 경험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 브릿마리 개인
가장 훈훈한 점은 살림만 하는 아내이자 엄마(아이를 낳아보지 않은)였을 뿐이었던 여성 브릿마리가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한 인간으로 서는 결말
부분이다. 타인과 공존하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 안에서 브릿마리는 남편
켄트의 사랑을 되찾는 동시에 스벤의 사랑을 받는데, 그가 결국 어느 문을 여는지는 소설에서 직접 확인해보기를 바란다.
이번 미션서평 도서를 비매품 가제본 형태로 받았는데 이미 오탈자가 전혀 없이 완벽해서 만족스러웠다. 역시 책 잘 만드는 다산북스, 표지
색감과 일러스트 마저도 너무 예뻐 마음에 들었다. 평일 저녁에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분주한 일상 속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