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흰 5기 미션도서라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았지만 선택 도서였더라도 신청했을 테다. 왜냐면 지도 교수님께서 니체 전공자셔서 석사 때 강의를
들으며 니체 저작을 함께 읽었기에 항상 관심 있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어렴풋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선악의 저편"
같은 책의 부분 부분을 읽으며 '니체= 중2병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자는 니체의 그러한 점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까발리고'
있다. 다산북스 공홈에서 이 책 제목을 투표로 붙이는 상황을 본 적이 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니체 사상을 토대로 보여주는 인문학이나
인간학이라기보다는 니체라는 인간에 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니체론'이나 '니체라는 인간' 같은 제목이 더 걸맞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앞부분은 니체 사상 전반을 다루기도 하는데 결국 저자가 강하게 하고 싶었던 주장은 니체는 자신이 비판하던 바로 그 '약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초인이 아니었다'는 메시지인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유행 이후 니체가 세계 어디서나 떠받들여지고 있는 이 때 분명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주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 자신이 에필로그에 이 책을 내면서 항의를 받을까봐 걱정했다고 적었듯이 말이다.
"착한 사람만큼 나쁜 사람은 없다"
* 니체 사상
일본에서 '싸우는 철학자'로 유명하다는 저자는 니체의 입을 빌어 약하고 착한 사람을 비판한다. 이들은 공동체를 두려워하면서 침묵하는
순응자이자,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았을 때만 착한 안전주의자이다. 특히 우리는 일본인들이 흔히 조용히 질서 잘 지키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별로 발언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들어 맞는 주장이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자 모범생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며
살았을 분들과 함께 근무하다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을 뼈저리게 공감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러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부당한 관행으로
고통스러워 발언하려고 할 때, 어떤 선생님은 뒤에서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인성도 실력'임을 주장하는 기이한 이
사회에서 그러한 착함을 진정한 착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내 안전'을 최대 가치로 추구하는 지금 자신의 진정한 건강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의 약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배체되는 일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게
뭐든 자신이 현재 속한 공동체의 방침에 어느새 동참하게 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지극히 부드럽고 온화하다. 그러나 신변의 안전이 위협 받는 전시가
되면 그 즉시 만사를 팽개치고 권위에 자신을 맞춘다. 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을 배신하고, 지금 막 내뱉은 주장을 취소하며, 조그만 위험에도
조개처럼 입을 닫는다." 47쪽.
길지만 비슷한 주장들을 계속 인용해본다. 이 책이 보이는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사실 저자는 니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이를 테면 니체가 첫 책 "비극의 탄생" 출간 당시 비난을 당한 이후 줄곧 자신의 글에서
개미처럼 성실하기만 한 고전 문헌 학자를 비판한다. 또 추앙하다시피 친하게 지내던 바그너가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의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혹은 니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바그너와 결별하고 바그너를 속물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문제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오프라인 면대면
관계에서는 니체가 약하고 착하고 온순한 언행을 보였으나 글에서는 매우 거칠게 거의 모든 당대 사람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량한 약자는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온화하다. 남의 면전에 대고 심술을 부리는 경우도 없고, 남이 보는
데서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편안하게 쉬고 있는 장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며, 한없이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들은 모두가 보고 있는 곳, 칭찬을 받을 듯한 곳에서는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한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느끼며 들뜬 기분에 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뒤에서 남몰래 움직인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소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에 관한 모든 평판을 찾아낸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악평이 나오면 그 불씨를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며 불씨를 퍼트린 장본인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뒤에서는 끈질기게 그를 저주하며 몰락을 기원한다. 하지만 당사자와 얼굴을 마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낯으로
대한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신변의 위협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달아난다."
78-79쪽.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니체처럼 인간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잘하던 사람이 왜 정작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 못했는지 한탄한다. '안전'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저자의 통찰이 대단하다. 무사 안일주의로 최대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라면 인생에서 모험하거나 고통을 없애고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는 일 따위는 최대한 피한다. 니체가 말년에
정신적으로 어려워진 이유에는 그렇게 일상에서 자신을 억눌렀던 행동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선량한 약자는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도 악행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자기비판적 시각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관찰하는 눈이 없다.
왜 그들 몸속에는 이런 비판적 안목이 움트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되도록 안락하게, 게다가
이득을 보며(손해 없이)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범죄는커녕 나쁜 짓조차 전혀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무난하게 산다, 안전하게
산다'라는 대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신도 여차하면 나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사실을 외면하는 기술을 익힌 것이다." 99쪽.
니체를 싫어하고 칸트를 좋아한다는 저자는 칸트의 말을 빌어 니체가 비판했고 니체 자신도 가지고 있던 그러한 약하고 착한 성향이 사실은
진정으로 착한 모습이 아니었음을 꼬집는다.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되는 편협한 착함은 여전히 보편적이지 않아 우리 밖에 있는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우리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소수가 있다면 그들의 말이 합리적이고 옳다고 하더라도 다수는 일단 그들을 누른다.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에게 나쁜 사람 이미지를 덧씌워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착하고 안전하다며 안도한다.
"착한 사람은 칸트가 뚜렷이 제시했듯 성실성과 행복이 양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행복을
최고로 꼽는 인종이므로 자타의 행복이 일치할 때만 성실성을 바란다. 이 말인즉슨 자타의 행복과 성실함이 일치할 것 같은 토양에서만 성실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어떤 토양인가? 약하면서 옳은, 즉 약해서 옳은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는 토양,
같은 종류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토양이다. 이리하여 퍼석퍼석한 인공비료를 충분히 뿌린 토양에서 그들은 그저 자기기만의 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그들은 사회의 규칙과 관습, 예의를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성실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성실함은
언제나 사회의 주어진 규칙과 관습, 예의의 틀 안에 있다. 그들의 성실함은 틀 밖을 엿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밖으로 나오는 자를 격렬하게
단죄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성실함, 즉 원래 의미의 성실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142-143쪽.
* 니체= 중2병, 관심 종자, 우쭈쭈가 필요한 유아 같은
사람
결국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중2병이자 관심 종자였던 니체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야말로 주변 사람들의 '우쭈쭈'가 필요했던
유아 같은 사람으로 니체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니체 자신도 '초인'이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니체 자신이 비판했던 '약한'
모습을 니체 자신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센척'하지 않았느냐는 저자의 주장을 (주류 주장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니체
자신이나 니체를 사랑하는 전공자들은 부당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지만) 새겨 들어볼 만하다. 그래서 더불어 '싸우는 철학자'라 불린다는 저자는
그러한 면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일상에서 발언할 때 '원한' 그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 싸움을 위해 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원문 출처: http://blog.yes24.com/document/8949676 (저의 주력 블로그는 예스이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