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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김초엽 작가는 2017년 이 책과 동명의 단편을 <한국과학문학상>에 실었다. 한국과학문학상이란 굉장히 희귀한 상이다. SF문학상을 내고자 하는 시도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그래서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가가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은 조금은 '우주비행사가 걷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독자인 나의 특수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리뷰를 읽으며 독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는 않겠지만 특수성이라고 단어를 던진 김에 내 이야기를 조금 하자. 나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회원이자 SF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여성이고 이곳저곳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산다. 그 덕분에 소위 '신체개조'와 '보조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완전한 몸을 가진 나에게 기계와 함께하는 몸이라는 건 언제나 재미있는 탐구 분야다. 의족, 의수, 인공안구, 인공와우 등 이미 발명된 기구들과 언젠가 발명될 기구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럼 이제 책 이야기를 하자. 거창하게 선언했지만 사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닐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작가에게 기대하는, 책 뒤에 실리는 추천사나 해설의 말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위에서 말한 특수성(앞으로는 소수성이라고 해 보자)을 가진 독자로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한다. 저기, 제가 제목에 불완전 신체 소유자라고 쓰긴 했는데요. 완전 신체라는 건 대체 뭘까요? 안경 등의 보조기구가 필요 없는 시력, 청력, 평균의 지능과 판단력과 행동 능력 등등을 지닌 것을 보편 신체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완전이 아니라 보편이라는 점이다. 독수리의 시력이나 펠프스의 수영 능력, 우사인 볼트의 스피드를 보편 신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전부 불완전 신체라는 이야기다. 보편적일지언정 이것이 완전하다고 하기에는 인간보다 뛰어난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으므로.
그렇다면 우리가 개조를 통해, 또는 보조기구를 통해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얻는 것은 '비인간적'일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이모는 인간을 초월한 신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한다. 우주에 가는 커다란 허들을 넘기 위해 몸을 고친 뒤라도 그들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보편 혹은 표준에 비해 미달하는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가 인간이 아닐 것은 무엇인가? 신기하게도 인간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인간 취급' 하지 않는 일들이 상당히 많다. 두 다리로 걷는 인간이 한 다리만 다쳐 봐도 이 세계가 두 다리 위주로 계획되었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게 된다. 그런 차별의 방식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비개조인과 개조인의 사회로 나타난다. <스펙트럼>은 죽은 후 계속하여 기억을 계승하는 종족을 통해 인간의 죽음-단절을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공생 가설>에서는 외계인이 인간에게 소위 말하는 '인간성'을 부여한 것으로 가정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냉동 수면을 거듭하여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안나의 눈으로 100년 남짓한 생을 살아가는 '짧은 수명'인간을 본다. 그러나 '보편 신체' '불완전 신체'를 가진 자들에게 주인공들은 상냥하다.
상냥하다는 것은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이, 나보다 몸이/정신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90년대의 학교 및 사회교육이 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보면 다가가서 도움을 주세요! 라니. 음. 먼저 장애인이 도움을 원하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나요?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도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구축하는 거고요. 아무튼, 이 문제는 요즘에는 조금 다르게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상냥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상냥함은 '넌 그렇구나. 난 이래.' 라고 말하고 산뜻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아, 넌 개조인이구나? 난 비개조인이야. 너는 죽으면 기억이 소멸해? 우린 새 개체가 기억을 계승해. 그 과정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보지 않는 점이 김초엽 작가 나름의 상냥함이라고 느꼈다.
그 상냥함을 소설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일종의 제안이다. 나는 이런 세계를 만들었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좀 나아갔으면 좋겠어, 라는 말. 나는 그 선언에 대체로 찬성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와 좀 다르건 말건 크게 오버하며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 나는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와 좀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으면 좋겠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우위에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라, '불쌍하게도' 라며 타인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언제든 주먹이 되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까칠한 마음이지만 현실이 그랬다. 뭐 어디가 그렇게 불편하다고 툴툴거려?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굳이 이 리뷰를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인간이 120세를 살 수 있는 시대라지만 30세를 넘은 몸은 점차 노화한다. 언젠가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빨리,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을 것이고 잔글씨를 읽지 못할 것이고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뛰어서 건너는 것은 포기할 것이다.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고 행동이 느려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 신체다. 모두가 종종 외면하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살아 있다면. 나는 내가 노화한 후의 세상이 좀 더 상냥했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 지금 상냥한 이야기들을 많이 읽고 나 자신이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상냥함의 일부에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들을 집어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과학소설을 쓰고자 하는 작가로, 상냥함을 좋아하는 독자로, 김초엽 작가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