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8년 만의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오래 전부터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바로 리뷰를 쓰는 것을 최소한의 원칙으로 삼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렇지 못한 책은 있게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인지 그런 책은 아직 10권이 채 되지 않는데, 이 책이 그 중 하나이다. 내가 쓴 로마인 이야기 리뷰가 그 먼 옛날인 1997년에서 멈춰 있는 이유는 책을 안 읽은 것이 아니라, 리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 역시 처음 발간되었던 1998년에 재빨리 사들였다.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을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살던 곳보다 신간이 더 빨리 도착하는 전주까지 가서 책을 사온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 읽었었다. 하지만 왜 리뷰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 후 2001년에도 다시 한번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역시 쓰지 못했다. 여러모로 퍽이나 어수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데, 그 이후로는 한동안 아예 책도 안 읽고 리뷰도 안 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완독을 하고도 아무 기록도 못 남긴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결국 나 자신의 강박관념과 이 책을 다시 한번 읽고 리뷰를 쓰지 않고서는 로마인 이야기의 다음 권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이 책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리뷰를 쓸 때보다도 책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의 내용이 기억에 더 많이 남았던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머리 속에서 오간 생각들은 이번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역시 로마인 이야기라는 시리즈 자체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대한 것이었다. 역시 이 책이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힘에 의한 제국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좀더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물론 그녀가 일본인이며, 한때 미-일 안보동맹에 반대하는 좌파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일수록,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관(觀)에 대해서 그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어진 외적 정보만을 가지고 단칼에 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인이니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한때 학생운동을 했었다고 하니 우리 주위에도 그리 드물지 않은 '왕년의' 민주화 투사(내지는 변절자)의 뻔한 궤적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내가 할 말은 결국 정해져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술에 일본 제국주의가 로마와 같았다면,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 내지는 앞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조언의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녀가 희망한 또는 조언하는 그 제국주의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일본 제국주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의문이 남는다. 단순히, 일본인이 제국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만으로, 그녀가 과거에 행해졌던 일본에 의한 제국주의를 옹호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태한 판단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18∼19세기 무렵의 영국의 제국주의도, 프랑스의 제국주의도, 일본의 제국주의도 아닌, 고대의 로마가 행한 제국주의인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다면, 직접 근대 일본사를 저술해서 그 시대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분명한 저술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로마인 이야기를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교묘한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 혹은 주장하는 것은 명색이 역사 연구자로서 30년 넘는 세월을 투자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30년을 투자해서 로마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것보다는, 10년만 투자해서 직접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결국은 작은 단서만 보고 단정하거나, 타인의 단정만 믿고 단정하기 전에 내가 직접 읽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이어서, 흔히 원조 우파보다 더 과격하고 비합리적인 성향을 띠고는 하는 좌파에서 우파로의 전환자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인물들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을 이유로 과거에 그들이 좌파로서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에 대한 진정성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는 너무도 상이한 현재의 그들을 보며, 그들의 과거가 우파로서의 삶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미지 관리였다는 생각을 지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시오노 나나미는 어떤 쪽일까. 내가 그녀의 전기 작가도 아닌 이상, 그녀가 얼마나 좌파로서의(?) 학생 운동에 충실했는지를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대담에서, 그 자신이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일본 내각의 대신 중 한 사람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후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된다.)와도 면담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미래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게리 쿠퍼가 죽었다는 이유로 학교를 쉴 정도로 자유분방했던 젊은 시절의 그녀가 미래의 커리어를 염두에 두고 학생운동을 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스스로 밝혔듯이, 학생운동을 그만두게 한 계기로서의 '마키아벨리'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자유가 없는 질서와 질서가 없는 자유 중에서 전자를 택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또한 이 말은 시오노가 그녀의 책에서도 직접 인용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은 그 전성기, 다시 말해서 고유한 그들의 시스템이 잘 작동되던 시기에 제국 전역에 질서와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었다. 로마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약육강식의 살육전은 없었고, 원활한 자원의 유통 속에서 먹고 살기도 어렵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처벌하지도 않았다. 물론 황제와 원로원 사이에서는 국가반역죄를 명분으로 한 일방적인 축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제 할 일만 한다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도 황제의 근위병이나 군단병에게 끌려가서 목을 잘릴 일은 없다. 국가에 협조하고, 그 대신에 국가는 그들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협조가 질서라면, 국가가 시민에게 해주는 것은 역시 빵과 서커스, 그리고 안전보장이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이 생각은 앞서서 말했던,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그녀의 관점과도 연관되는 데, 그녀는 국가와 시민의 상호합의와 상호간의 의무 준수로서 성립되는 제국주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제국이 유지되던 시대가 지닌 난점으로 인해 적지 않은 차이점이 오늘날과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자유에 대한 통제로서 성립되는 질서를 바탕으로 국가는 효율적인 통치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국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자유에 대한 대가를 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본 로마의 제국주의다.

 그러나 과연 로마의 번영이 자유와 빵 혹은 서커스의 일대일 교환만으로 유지되었는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자유 대신 밥을 보장한다던 박정희 정권이 결국은 무너졌듯이, 로마 역시도 자유의 통제를 통한 효율성의 극대화와 반대급부의 제공이라는 시스템만으로는 일찌감치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인간 개개인의 인식과 삶에 있어서 식량과 안전보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대보다는 클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빵의 보장과 일신의 안전을 대가로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로마 제국은 종교의 자유, 세제의 합리성, 재판의 공정성 등을 통해서 제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틀을 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제국 발전의 또다른 동력으로 기능했던 것이 바로 로마의 개방성이었다. 로마의 개방성은 공화정 시절부터의 전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개방정책은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를 이탈리아 반도 안의 여러 도시국가 중 하나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기득권층으로 구성된 원로원에 의한 공화정 하에서 지도층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밖의 피지배층까지 확대시키려는 의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기득권층-원로원-의 소극성은 제정으로 접어든 이후에도 종종 눈에 띄는 사실이다.

 결국 로마의 두 번째 성장 동력으로서의 개방성에 추진력을 더한 것은 사실상 제정의 문을 연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갈리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해외 속주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포용하게 된다. 이는 그 이전에 교사나 의사와 같이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보유한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던 것과도 궤를 달리한다. 그러한 형태의 개방정책이 단순히 기능을 가진 당사자를 겨냥한 1대(代)를 위한 정책이라면, 피정복자라고 할 수 있는 속주민을 대상으로 원로원의 문호를 열고, 시민권 획득의 기회를 여는 것은 이민족과의 영속적인 공존공영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피정복자 스스로 질서와 생활의 유지를 보장하는, 차별 없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로마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고 그 구성원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로마는 그들을 강제로 자신들의 시민으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속주민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그들 이민족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의식과 실제 그들이 구성하는 민족국가의 차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위험도 여기에 있다. 국가라는 공동체의 역할을 단순히 생활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한다면, 역시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한일합방 역시 그 요건만 충족된다면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국가의 존재가 반드시 민족의식의 존재와 일치하는 것인지, 혹은 민족국가의 부재 하에서도 생활의 안정이 보장된다면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의 민족의식의 유지도 가능하고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를 읽고 내린 결론은,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각 시대에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활의 안정과 사회체제의 공정성이 보장된 다민족 국가 체제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민족 간의 납득과 인정 가운데 성립하는 운명공동체적 체제 혹은 인식은 그것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이것은 제국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국주의와 동일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본다. 당연히 이러한 시오노 식 제국주의는, 그 체제가 단일 민족 중심의 국가 체제 보다 생활과 안전의 보장에 유리하며, 적어도 다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인식과 동시에 개별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보장되는 혹은 최소한 탄압 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후자의 조건에 있어서 시오노의 저서 속에서 로마가 자신들이 포용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의 고유한 민족의식을 보장했다는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물론 자신들과 유사하고, 자신들이 따랐던 그리스 민족에 있어서는 특별한 배려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특별히 보편적인 민족의식 유지책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민족의식을 억압하거나 억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생활과 질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다 민족 공동체 자체가 고유한 민족 의식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네로의 정치를 견디다 못한 갈리아 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갈리아 인의 독립이 아니라, 로마를 위한 황제의 교체를 요구했던 데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로마의 개방노선은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법의 하나이자, 자유의 통제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 운영이 요구하는 효율성의 새로운 동력을 찾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의식을 의도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생활의 안정과 안전의 보장을 오늘날보다 더 중시했던 당시로서는 일종의 자발적 망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로마 제국 체제가 가진 의도적 오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30만의 신을 받아들일 정도로 타문화와의 접촉과 융합에 관대했던 로마 제국에서 제국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이상, 각 민족의 고유성을 부인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제국 운영의 효율성에도 배치될뿐더러, 로마 제국의 원주민(?)의 문화에도 배치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제국의 관점에서 볼 때도 각 민족의 그들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하나이자 여럿인 다 민족 제국, 로마 제국 자체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민족인 그들 모두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국가는 그들에게 책임을 진다는 구성원과 국가 모두의 자부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단지 어느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국가 통치의 효율성 자체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시오노 나나미가 제국주의 옹호론일 수도 있는, 민족 의식과 민족 국가가 분리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을 제시하면서까지, 국가에 의한 시민들의 생활과 안정 보장의 측면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어느 민족이라는 정체성 혹은 이 국가가 어느 민족의 국가라는 자각이 국가가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의무에 우선하는가, 혹은 그 두 가지는 반드시 일치할 수밖에 없는 지,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국가체제만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지키고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인지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로마 시대에 비해 국가를 상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만이 그것을 받아줄 수 있으며, 혹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반드시 필요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시민들의 요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민족 의식보다 우선하는가. 설령 정작 그 당사자인 시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도 그 요구를 보장하는 지도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래야만 하는가. 진정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요구를 받아줄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이런 식의 자발적 통합은 국가의 당대가 아니라, 영속을 위한 개방정책이었다. 큰 호수에 끊임없이 맑은 물을 공급하듯이, 로마 제국에 검증된 인적자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한 동시에, 이미 말했듯이 제국의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동력이기도 했다. 이미 얘기했듯이 로마 제국 발전의 첫 번째 동력은 생활의 안정을 위한 시민 자유의 합리적인 제어였다. 그 결과 시민들의 자유가 적절히 보장되고(적절히 통제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활과 질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제국 체제가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첫 번째 동력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백했기 때문에, 제국의 개방노선은 반드시 필요했고, 또한 원활한 제국 체제가 속주민들이 제국에 편입되도록 자발적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속주와 제국 체제가 결속되는 효과를 가져오고, 또한 이러한 결속이 제국 체제의 원활한 유지에 기여하는 선순환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의 개방노선은 기존 시민들의 자유의 범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독립된 체제대신 새로이 로마 제국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도 그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이익 보거나 손해보지 않는 균형 위에 수립되어 있었다.

 단순히 이탈리아 반도에 '의한' 다민족 지배 체제를 넘어서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으로 경제 중심지인 3대 도시 중 2개 도시는 동방에 있었다) 통합 구조를 구축한 개방체제가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로마 제국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제국주의는 일방적인 지배를 통한 착취 체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얻는 것이 있는 만큼 지배자 역시 그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 소모는 피지배자의 반발이 심해질수록 이익과 손해의 균형이 붕괴됨으로써 제국주의 체제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반면에 수많은 민족들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정책은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과 그들의 공존공영을 의미한다. 서로 간에 한 체제의 구성원으로써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번영이 공동체의 번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과도 연관될 수 있기에 표현이 망설여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사에 불과했으며, 한번도 그 의미에 걸 맞는 실행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시하기로 했다. 어떤 체제도 일방적으로 나쁘기는 어렵다. 결정적으로 잃는 것이 있는 만큼, 결정적으로 얻는 것이 있다. 다민족 제국으로서 이민족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는 제국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여러 가지 다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로마인들은 단순한 시혜(施惠)나, 문화적 특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개방노선이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하는 국가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정책이 시행되었다. 시오노가 주목한 제국의 이 측면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다. 세상에 이익만큼 인간을 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애초에 좌파를 가장했던 우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좌파의 과거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오버하는 우파 노친네도 아닌 그녀는 시민 일반이 지닌 자유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또한 그렇지 못한 지도자-칼리굴라와 네로-를 제거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던 제국 체제의 실체를 조명하고 있다. 결국 그녀는 일반적인 시민들이 원하는 것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위성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 까닭에 자유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시민들이 절실하게 원하고 또한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보장해준 제국 체제를 그녀 나름의 시선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자유를 제어하는 것을 공식적인 통치의 일환으로 표명하는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흔히 이야기하듯이, 그 시대의 특성에 주목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늘날도 분명 여러 형태로 우리의 자유는 제어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그리고 우리도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얻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단순히 고대 사회에 자유를 제어했다고 해서 무조건 오늘날보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로마제국의 시대적 특성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자유의 제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구체적 방법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엄존하는 자유의 제어 그 자체는 시대상의 차원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정치의 현실이다.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 실천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대상의 고려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선심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태도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정치의 운용이 예나 지금이나 적절한 대가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했듯이, 바로 사람들이 원하고, 그들 삶에 중요한 부분 속에는 자유 역시도 포함된다. 자유와 빵을 교환하는 체제가 지닌 맹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로마 제국의 개방성을 더욱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가 무조건 보수적 혹은 우파적 관점에서 자유와 맞바꾸어진 질서만을 옹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장황하게 말했듯이 그녀는 시민들에게 적절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개방성을 조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방성은 질서와 자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로마가 찾은 저울추였던 셈이다. 이런 그녀를 단순히 보수 우파 역사가 혹은 변절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질서를 중시하는 시각 혹은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어느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펜을 휘두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유를 제어하는 정치의 장점과 동시에 그 통제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정책을 동시에 조명했을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역시 독자의 주체적인 비판의식에 달려있다. 물론 결정적인 단점은 존재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유와 교환된 질서가 지닌 단점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자유가 희생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는 달리 질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단점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바꿔 말하면 질서를 양보하면서 자유의 입지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자유의 장점에서는 찾을 수 있지만, 질서가 지닌 단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이는 궁극적으로 그녀가 식량과 안전보장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집착했기 때문에 빚어진 허점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역시 이 중요한 두 가지를 위해서는 자유보다 질서가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자면, 자신에 대한 비난과 혹평을 무릅쓰고 질서를 보장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던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결과적으로 그에 걸맞는 시민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질서가 지닌 내재적 모순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는 어떤 뚜렷한 실책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질서의 수립과 유지가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는 그 수혜자인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심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식량과 안전보장이라는 물리적인 문제에  집중한 그녀로서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황제를 서술하면서, 정치에 있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무관심한 결과 빚어지는 불필요한 오해와 비난의 문제를 나름대로 지적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녀는 비록 자유와 대비되는 질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의 추진과 유지에 있어서 빚어지는 문제를 간과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는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와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신속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것이 결국 질서 자체가 궁극적으로 지닌 문제의 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질서의 수혜자가 되는 시민들이 질서의 추진에 거부감 혹은 싫증을 느끼고, 결과적으로는 비협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확대해서 바라본다면 이는 결국 지도자가 구축한 질서 자체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티베리우스 이후의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이후의 네로처럼 말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파괴가 질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했으며, 티베리우스가 반석 위에 올린 제정을 손질했다고 평가한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에 이르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단절되고 말았다. 과연 그는 무엇을 손질했던 것일까. 결국 무너지기 위해서 손질하는 것이라면, 자유와 맞바꾼 질서는 어디까지나 오늘은 보장해줄 수 있어도, 내일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더 필요할 수도 있고, 더 불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시오노와 비슷하게 질서에 눈이 간다는 것이다. 독재는 싫지만, 문화대혁명은 증오스러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