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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임기환 기획,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 1 ]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역사는 진실이고, 소설은 거짓이다”라는 말은 착각이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고도 분명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르만 신화 조작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역사가 잘못 알려질 경우, 현실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일본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진실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1984』의 빅브라더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그래서 그들은 빅브라더를 위대한 구원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잘못된 현실을 만들거나, 현실의 잘못을 유지시키는데 (자신들도 모른 채) 협조하게 된다.

  잘못 알려진 경우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알려지지 않는, 더구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역사도 역시 문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혹 우리의 광복이 오로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서만 얻어진 타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감추어진 역사 역시 현실을 잘못된 방향으로, 혹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발굴하고, 가르치고 거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 발굴 및 해석 수준은 아직 부족하기만 하고, 역사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도 충분하지 못하고,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은 수준을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온달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온달을 옛 이야기 속의 주인공, 그것도 ‘바보’로 한정시켜 받아들였고, 교육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바보에게 시집을 갔던 평강공주는 정말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나? 결혼한 후 짧은 시간 동안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온달이 과연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까? 온달은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투에 자진해서 나갔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연구(역사학과 국문학 모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이런 문제에 천착한 이 책의 기획의도 역시 탁월하다.


  「나는 먼저 온달 이야기를 분석한 모든 연구논저를 연구자의 시각과 분야에 따라 재분류했다. 그러자 역사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 경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 반면, 국문학자들은 온달이 설화 속 인물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다보니 어느 한족의 연구 성과에만 의존하다 보면 균형 잡힌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p.74.


  그러나 이 책 역시 온달 이야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더구나 이처럼 탁월한 문제의식을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것도 역시 문제이다. 타당하고 또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이렇게 반복해서 듣게 된다면 누군들 지겹지 않겠는가?


  사실, 이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연구를 통해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학적 논리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가진 상상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고, 또한 역사적인 오래를 일으킬 여지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도 설화나 허구에 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예술이 가진 영향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야, 연구인력 및 연구결과에 대한 수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고, 그래야 보다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옛 이야기에 대한 예술적인 상상력을 통한 접근이야 말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하겠다.


  일본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일본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역사와 설화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활발하게, 소름끼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대화 된 설화, 만화 <배가본드>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각종 게임에 도입되는 일본의 전래적 이야기 및 디자인적 요소들.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멋지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작업이 거의, 정말로 거의, 없다. 흔히 소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소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소재는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온달이 아닐까?

  물론 우리에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나리오(스토리텔링)에 있다. 이에 가장 적합한 말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그것을 잘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야기 즉 서사예술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계를 가진다. 이 책은 역사학과 국문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온달’의 역사성에 집착한 나머지, ‘온달과 평강공주’가 가지는 이야기성(敍事)을 간과하고 말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온달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는 인물이기 ㏏?甄?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적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온달이야기’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 2 ]


"아아, 온달이여, 살아서는 어리석지 않았고 죽어서는 신이런가.(嗚呼溫達 生亦不遇死猶神)"

- 이학규의 시 「우온달(愚溫達)」 중에서


   물론 이 책에서도 온달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나열과 소개에 그쳤을 뿐, 이를 재창조하는 작업, 혹은 재창조 작업에 대한 분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강조했다면, 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문학작품에서 온달이야기를 재해석 한 것으로는, 최인훈의 희곡「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김지원의 소설 「편강공주와 바보 언달」등이 있다. 이에 대한 분석,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면 더욱 다채로운 해석 가능성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희곡의 경우에는 그것을 공연했던 배우들이나 관람객들과의 인터뷰도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기획의도를 가진 저술이 보다 많이 발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도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면, 보다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문화산업의 가치를 강조하는 예로 영화 <타이타닉>이 거둔 수익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예는 <타이타닉>이 얼마를 벌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지, 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좋은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뿐만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책도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좋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 ]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맑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늘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하였다. 찢어진 옷과 헤진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삼국사기』권45 열전5 온달편


  사족이다. 온달이야기의 원문을 처음 공부했을 때부터, 나는 이 점이 참으로 궁금했다(그런데 왜 선생님들께 질문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될 뿐이다).


  원문에는 ‘愚溫達’이라고 되어 있다. 어리석을 (우)에 온달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를 ‘바보 온달’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석되는 것일까?

  어르신들의 호를 살펴보면 종종 ‘愚’자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愚巖’과 같은. 그런데 이 경우에 ‘愚’는 ‘바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다’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는” 혹은 “부귀권세를 탐내지 않는”이라는 의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愚溫達’ 역시 ‘바보 온달’이 아니라, ‘어리석은 온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숨은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주가 그에게 끌린 이유도, 온달이 어여쁜 공주를 거절하는 이유도, 공주와 결혼하면서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성장하여 용맹을 떨치는 원인도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한 문장만 가지고 짐작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를 해석한 연구자들은『삼국사기』전체 혹은 당대의 한문학 전체를 가지고 이 문장을 해석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하게 된다.


  내 해석과는 약간 다른 측면이지만, 愚溫達’이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 분도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님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관련 게시물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blog.naver.com/art2173/12001189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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