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몽상
이진경 / 푸른숲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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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수학의 몽상>은 지난 2000년 출판되어 이진경매니아들을 중심으로 특히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널리 알려진것 처럼 이진경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알려진 변혁운동의 이론가였으며, 현재는 인문학에 기반한 백과사전식 탐구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일컫어지기도 한다. <수학의 몽상>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집필되었고,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극찬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것 같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수학을 중심으로 '즐겁게 수학하기'라는 모토아래 이책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해온 근엄하고 무거운 수학이 '자유로운 수학하기'를 억눌러온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근대이래(혹은 고전시대부터) 수학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확장시켜왔는가를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추적한다. 이 책에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악마들이 등장한 픽션들이 등장하고, 복잡한 수학공식 대신 수학과 인간학(철학)의 관계를 통해 수학이 얼마나 유쾌하며 인간정신에 많은것을 기여해온것인가를 밝힌다.

물론, <수학의 몽상>에 대한 비판역시 만만치 않다. 이진경의 접근이 지나치게 수학의 유연성(flexible)을 강조해서, 수학의 엄밀성rigorisity)을 경시하고 있다는 지적은 상당히 공감이 가는 비판이다. 물론, 이런 비판들이 유효하다 하더라도 <수학의 몽상>은 여전히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자가 쓴 수학책으로, 엄숙하고 무거운 수학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한 수학을 소개하는 입문서로서, 잃어버렸던 수학에 대한 흥미를 되살리는데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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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창자 속으로 들어간 시
이대환 지음 / 실천문학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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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농활을 출발하는 날이었다. 내 가방속에는 이대환의 소설집 <생선 창자속으로 들어간 詩>라는 책 한권이 들어있었다. 일주일전 상주 농민회와의 간담회를 다녀온 후 서점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고른 책이었다. 제목에 '詩'라는 글자가 들어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때문에 그책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3학년이었고, 40명이 넘는 '지리 농활대'의 농활대장이었다. 우리 농활대가 들어가는 곳은 상주시 모서면 소정리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새벽기상, 오전 오후작업과, 분반활동, 평가, 주체회의, 새벽까지 이어지는 농민형님들과의 술자리까지, 잠시도 쉴틈없는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책임감으로 무장된 내 의식은 그런 피곤한 일상들을 무리없이 견뎌낼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짬짬히 자투리 시간을 모아 책을 읽었고, 그 책은 내 속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단편 <생선 창자속으로 들어간 時>에는 '우리들의 문민시대 3'이라는 작은 부제가 붙어있다. 소설은 주인공 김홍백이 아들의 담임선생님(역시 해직교사출신의)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을 빌어 전개된다. 김홍백은 동명산업이라는 중소기업의 계장이면서 남몰래 시를 써왔다. 80년대 후반, 그는 노조건설 과정에 깊숙히 개입하고, 회사내부의 비리를 폭로한 이유로 해고된다. 이후 소위 '블랙리스트'로 철저히 재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가족의 부양을 위해 그가 선택한 직업은 '생선장사'였다. 생선배따는 일급기술자가 되었을때 단 1편의 시를 쓴다.

'왜 시를 쓰지 않느냐, 빈번이는 아니지만 대개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직업가수가 밤무대에서 직업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시를 써서 먹고 살지 않으니 시인이 곧 나의 직업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시를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오랜 시간 쉬어도 좋다. 언젠가 가슴에 절실한 언어들이 골싹하게 고이면 혓바닥도 저절로 움직이겠지. 선생님.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찍히 저는 이렇습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포기한적 없습니다. ... 그렇지만 선생님 저는 정말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 속에서>

처음으로 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후 작업을 마치고 땅거미 깔리는 논둑길을 따라 마을회관으로 걸어오면서 흥얼거리던 '말'들은 내 수첩 한켠에 한자한자 옮겨졌다. 내 키보다 더 높이 자란 담배밭에서 옆순을 따내는 맑고 경쾌한 소리들이 '말'이 되어 적혔고, 까맣게 검댕이 낀 냄비뚜껑을 열면 꽃처럼 피어나던 하얀 밥 냄새도 '말'이되었다. 열흘의 짧은 농활기간이 끝나갈때 즈음, 넝마처럼 낡아버린 농활수첩 한켠에는 그렇게 모아진 대여섯편의 시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시가 쓰고 싶었다.

오늘, 책장에서 우연히 이 책을 찾아냈다. 제멋대로 구겨진 표지와 닳은 책장 속에 편지 한장이 들어있었다. 책을 펴들고 보니 5년전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화장실 뒤켠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배를 태우며 나누던 농담들이 되살아난다. 마을회관 천장을 까맣게 덮고 있던 파리떼를 보며 '까만은하수'를 떠올린 천진난만한 후배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엄더미를 헤집으면 뽀얀 훈김에 섞어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불현듯 내 농활수첩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쓴 시들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사라져버린 내 수첩 한켠에 묻혀 어디선가 긴 시간을 견디고 있을지도, 혹은 누군가에 의해 불쏘시개로 쓰여 한줌 재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꺼내고 싶지도, 찾고 싶지도 않은 나의 소중한 기억들. 잃어버림으로 해서 더 소중한 나의 詩들.

그때 이후론 한번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적이 없다. 어디선가 잠자고 있을 나의 詩들을 대신해 소설속의 시 한편을 대신 적는다.

생선 창자 속으로 들어간 나의 시를
나는 꺼내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나의 시가
죽은 고기의 창자들과 함께
폐기물더미 속에 파묻히는 한낮
오, 눈물도 슬픔도 없는 장례여
시의 죽음이여.

썩은 창자의 무덤을 뚫고 올라와
내 젊은 날의 혀처럼 붉게 피어나는 꽃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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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 - 백의신서 64
개리 거팅 지음, 홍은영 박상우 옮김 / 백의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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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깡낄렘 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푸코읽기.

사실 미쉘푸코만큼 우리나라에서 많이 소개된 프랑스 철학자도 드물다. 물론 푸코가 이루어낸 담론들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푸코를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의 철학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푸코에 대한 연구서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이 책은 푸코의 초기저작이라고 할수 있는 ,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과 <성의역사 1-앎의의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책의 첫장에서 다루고 있는 '바슐라르'와 '깡낄렘'의 과학철학이다.

영미권에서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바슐라르-깡낄렘을 잇는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이 푸코에게 있어 어떻게 체화되어있는가를 그의 초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앞서 말한, 푸코를 지나치게 '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의 문제와 함께 지은이 게리 커팅은 푸코의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 '계보학'에만 매달려 그를 권력을 둘러싼 담론을 생산한 철학자라는 편협한 사고를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푸코를 소개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소운 이정우의 푸코읽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것 처럼 이책은 '푸꼬의 사상과 방법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책이 너무 어려워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해설서를 찾게되는 독자'와 '어느 정도 푸꼬의 책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해한 내용보다 더욱 발전된 푸꼬 해석이나 비판적 관점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이면서 프랑스 근대 과학철학에 대한 자신의 부족한 이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하여 무척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이부분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영미철학권에서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전통은 쉽게 무시되어 온것같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라는 프랑스철학의 두 주류를 이해하기 위하여 프랑스과학철학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짧은 생각을 가져본다.

이책의 전반부를 자지하는 바슐라르의 인신론적 단절을 통한 과학의 발전모델은 새내기시절 무척 진지하게 읽을수 있었던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함께 만은 깨닳음을 주었다. 그리고 '페러다임'을 통한 쿤의 과학발전의 모델에 대한 바슐라르-깡낄렘을 잇는 프랑스과학철학적 관점의 비판은 고정된 사고를 보정해 줄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것 같다.

사실 이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채 지나간것 같다. 다만 권력과 계보학의 틀에서 행해진 푸코를 넘어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을 잇는 푸코의 인식론과 과학철학, 그리고 고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삼는다. 과학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을 조금더 익힌후 다시 도전해 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낄수 있는 책이 될것이다.

무엇인가를 알게되었다는 뿌듯함 보다는 새롭게 공부해야할 영역을 열어준 문제제기에 퍽 유용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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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손석춘 / 개마고원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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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씨는 현재 한겨레 신문사의 여론매체부장으로 자리하면서, 신문 지면을 통하여 언론개혁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한겨레 칼럼 '손석춘의 여론읽기'는 제가 매번 빼놓지 않고 읽는 몇 안되는 칼럼이기도 합니다.

<< 신문읽기의 혁명 >>
- 손석춘 著, 개마고원,

이 책의 앞부분에 보면 조그마한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편집을 읽어야 기사가 보인다' 이 부제가 책 전체의 내용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신문을 기사의 내용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신문 기사는 취재기자가 쓰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기사가 어떻게 의해 작성되고 편집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제기는 거의 이루어 지지 않고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손석춘씨는 이 책을 통하여 신문사의 구조와 각 구조들의 역할관계를 통하여 신문사가 어떠한 시스템에 의하여 구동되어 지는지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문사의 시스템 속에서는 어떤 기사되 자유롭게 취재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질수 없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신문사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편집국(편집부)의 역할과 중요성 그리고 편집을 통하여 같은 사실이라도 그것이 편집에 따라 독자에게 어떻게 읽혀지고 여론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이 책은 다루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문의 사설이 갖는 의미와 사설(사설위원)이 신문전체에 미치는 영향력, 광고(자본)와 압력단체(정권)가 신문의 편집과 발행에 미치는 영향등등 하나의 신문이 완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되기 까지에 발생할수 있는 조작과 왜곡의 전반적인 문제를 신문사의 구조와 신문지면의 구성을 통하여 꼼꼼히 짚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가 풍부한 예시에 있다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와있는 언론관련 책들의 경우 딱딱한 이론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엮여 있어 일기 힘든데 반하여 이 책은 실지 우리의 신문들이 어떠한 기사를 어떻게 싣고 있는가를 직접 보여주여 독자로 하여금 쉽게 신문읽기의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예문으로 제시하고 있는 과거의 어거지 신문기사들을 본다면 피가 거꾸로 솟아나는 듯한 생생한 감동(?)을 받으실수 있을 것입니다.

이책의 기획의도는 대하여 저자는 그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비판적 신문읽기를 시도하려는 초보자를 위한 지침서입니다. 따라서 어렵고 이론적인 표현과 논조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 구성되어 언론에대한 특별한 배경지식이 없다하더라도 편하게 읽으실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언론 특히 조선일보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는 독자라면, 이 불만을 어떻게 풀어낼수 있는지 그 해결책을 발견하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언론비판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하여 필요한 기본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우리사회에서 실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언론이 절대 국민들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구동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신문에 대한 비판적 읽기 능력일 것입니다. 그점에서 출판된지 3년여가 지난 이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독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의미있는 말 하나를 찾았습니다. '신문은 결코 독자를 능가할수 없다'. 조선일보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왜 우리에게 신문읽기의 혁명이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 있었습니다. 물론 귀퉁이서 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조선일보의 왕국을 보면서 차츰 우리 독자들의 수준만큼 우리 신문도 나아지리라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 봅니다.

꼬랑지) 신문읽기의 혁명을 읽고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신문읽기의 혁명>의 다음 이야기라 할수 있는 <언론개혁의 무기> (손석춘 著, 개마고원, 9,000원)에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판적 신문읽기의 독자운동에서 한발 나아가 언론개혁을 위한 적극적 독자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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