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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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제목에 충실한 책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것이라는 책 소개에 걸맞게, 이 책은 1979년에서 2010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미발표 에세이와 단편소설, 문학상 수상소감 등을 엮은 잡문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속의 머리말에서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라고 밝혔는데, 말 그대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면면을 그의 글로 명징하게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잡문집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100마디 덕담보다 더한 감사와 힘을 얻고 갈 수 있다.

 

복주머니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이 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보다 목차를 펼쳐 끌리는 제목의 글을 무작위로 읽는 것이 이 책을 더욱 즐기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글은 하루키의 소설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자기란 무엇인가>와 서점 경영인들이 뽑는 신부상 수상 소감인 <제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였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p.19)

"요즘 소설이 힘든 시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특히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세간의 통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의 모든 장소에서 이야기라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줄곧 지켜왔습니다. 그 빛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그 빛으로만 밝힐 수 있는 고유한 장소를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시점으로 그 고유한 장소를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p.76)

 

하루키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답변이었지만, 이는 어찌 보면 내가 평소 고민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되기도 했다.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 출판업의 위기다'라는 질문에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때, 하루키의 소신 있는 답변은 이것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나만의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루키를 검색하면 나오는 감상평 중 소설보다 에세이를 잘 쓰는 작가라는 평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결코 소설을 못 쓴다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의 감상과 철학을 담담하고 묵직하게 풀어내는 하루키의 감각이 에세이라는 글의 결()과 매우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책 속의 <폼나게 나이들기는 어렵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에게는 두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면 가까이에 기름층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이 저절로 술술 솟구치는 타입, 다른 하나는 땅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기름층을 만날 수 없는 타입 (p.145) 

하루키는 스스로 자신은 후자에 속한다고 밝혔는데, 그 점에 있어 책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하루키가 써 내려간 글을 바탕으로 그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궁극적으로 하루키라는 사람을 만나게끔 해준다. 아직 하루키의 작품을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에게 이 책은 훌륭한 프롤로그가 될 것이고, 그의 팬인 독자라면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난 후 맞이하는 흥미로운 에필로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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