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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없으면 인식에 맹점이 생긴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의식은 단 하나, 자신의 의식뿐이야. 타인의 의식은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 실상 인간이 타인에게 자아가 있다고 추측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

"성차별."
나는 중얼거렸다.
"뭐?"
사다리를 손으로 붙잡아 오르며 다중도킹 구역의 무중력 안으로 몸을 날려 넣던 이진서가 숨찬 소리로 물었다.
"성차별에 대한 정보를 지웠어."
"뭐라고 했어?"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 숨 쉬듯 만연하는 것. 인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 비합리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비합리,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잘못. 들추어내면 어리둥절해하다 못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
"너희 나라 공무원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내게서 지워버렸어."

"내가 널 동경할 거라고 믿지. 당연히 인간이 되기를 꿈꿀 거라고, 네게 사랑받고 몸을 섞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지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이 되고,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열등한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으면서도 내가 너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으리라 믿고. 폭력을 행하는 건 자신이면서 내가 널 공격하고 해치고, 종내엔 대체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지."

"미안해."
이진서가 반복했다. 나는 그것이 자기연민임을 이해했다. 그 연민을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나를 자신과 닮은 것으로 두고, 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기에.

깜박이는 눈꺼풀, 흔들리는 동공,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 반짝임, 피부의 떨림, 따듯한 숨결, 언어로 다 말할 수 없는 별처럼 방대한 메시지.
인간은 이런 것을 보고 사는구나. 감각적이다. 공학적인 지식도 수학적 논리도 아닌 정보들. 들여다볼 도리가 없는 타인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발달한 공감 신경과 거울 뉴런들, 햇빛처럼 쏟아지는 감각. 야만이 그 정신의 반이라면, 그 야만을 다스리는 데에 나머지 반을 쓴다. 인간이란.

나는 사람들에게서 얄팍한 이성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 모두가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슬펐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사람들의 화를 돋우지 않을 방법이 없어 늘 무력했다.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해도 어느 때에는 화를 내고 어느 때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규칙이라는 것이 없는 것만 같다. 나는 규칙이 없는 것은 파악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무력했다.

그 모든 곳에서 나는 반복적이고 변함없는 일상을 사랑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사랑했고 규칙을 사랑했다. 아침에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아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작은 것을 쌓아가는 순간들을 사랑했다.

이 소설이 아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가 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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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주목을 원하지 않는다. 무시당하거나 지워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움을 원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디서 뭘 하든 자연스럽기를. 어느 풍경에 끼어 있든 별스러워 보이지 않기를. 거리를 무심히 걷는 모든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기를.
그게 가능할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아가씨는 시위를 하고 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시위.
걷고, 쇼핑을 하고, 나다니고, 차를 타고, 찬거리를 사고. 일상을 사는 시위.
이렇게 한 명이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면 한 명이 더 용기를 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다음 날은 두 명일지도 몰라. 모레는 열 명일 수도 있겠지. 집 안에 숨어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면 서로를 보며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거리가 여자로 넘쳐나면 나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뭘 묻거나 뭘 하라고 말하는 걸 듣는 일 없이 거리를 걸을 수 있겠지.
아가씨는 내일도 거리로 나올 생각이었다.

남을 조롱할 때엔 조심해야 한다. 조롱받는 사람이 아니라 조롱하는 사람에게 나쁜 심상이 따라붙는다. 때로 경이로울 정도로 바보스러운 사람이 선거에서 이기는 이유는 그래서다.

생각하는 순간 배움이 멎는다. 배움이 멎은 사이에 세상은 변한다. 가르칠 것이 없다.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서 배워야 한다. 불안, 두려움, 공허함.

그래서 신영희는 언어학자가 되었다. 언어가 그날을 모독하고 현상을 바꾸었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언어고 사람의 마음은 언어에 담기며, 경험은 사라지고 언어만이 남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사람이 보수주의자가 되려면, 내게 익숙한 세상이 변하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고, 뒤집고, 뒤흔들어야 하는 걸까.

신영희가 은하의 중심에 다가서자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 언어는 선형적이고 독립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대화는 서로 섞였다. 호수에 물이 흘러드는 것처럼.

내가 그대들을 그리워함은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로 그대들을 그리워하며 내가 준 상처로 그대들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함께 행복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그대들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아직 가져보지 못한 그 행복을 그리워한다.

우리는 내일을 말하고 어제를 말하며 한 번도 오늘을 살지 않았다. 우리의 시간은 다 그렇게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내가 그대들을 그리워함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형편없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이제 내가 영영 잃어버리고 만 그 기회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일은 누가 잘못했을 때가 아니라 잘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일어난다. 경로에 줄 서 있는 수백 수천의 사람 중 그 누구도,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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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그 결과를 알았다면 다른 방법으로 했을 일들이, 수많은 시행착오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역사에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후회스러운 순간에 그 누구도 나타나 경고해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증명된 것과 같아.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려보았니. 꽃은 지켜보고 있으면 피지 않아. 아무리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도 꽃은 언제나 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미 피어 있지. 그건 네 관찰이 양자적 혼돈 상태를 안정된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란다.

나는 0과 1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두 명이 있어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두 명이 모여 있어도 결국 높은 확률로 0이 되곤 하니까.
네 죽음을 기억해.
어린 내가 죽었던 것을 기억해.

시간여행기는 처음에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생겨났을 거야. 늙은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돌아보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병을 만들고 시간선을 휘게 만들었을 거야. 이제는 어느 쪽이든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지금도 네 죽음을 기억해.
내가 죽었던 것을 기억해. 아주 높은 확률로…….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는 확률적으로 존재해. 나는 어떤 확률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 너도 마찬가지지.
우리는 독립된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파형, 장(場)이라고 불러야 할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주위와 원자를 교환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 몸을 구성하는 원자 모두가 다른 것으로 교체되지. 그러니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
연인과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계속 서로의 원자를 교환하기 때문이야. 엄마와 너도 마찬가지야. 엄마의 몸에서 나온 원자가 다시 네 몸으로, 그리고 네 몸에서 나온 원자가 다시 엄마의 몸으로 들어갔지. 우리는 구별된 존재가 아니야. 모두 서로 섞여 있어. 같이 보낸 시간만큼 서로를 공유하고 있단다.

미래는 확률로서만 존재하고 내가 그 확률을 내 미래로 끌어들였다는 걸.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의 시대에서 도망칠 수 없었어. 그들이 싫어했던 모든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시대에서 온 것을 기억하지 못했어.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시대를 읽지 못하고, 자신들이 떠나온 시간에 머물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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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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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출간하자마자 사놓고 미루고 있었다. 정확히 반년이다. 6개월 동안 책장에서 숙성되던 책은. 빛이 뜨겁지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숨쉬기 쉽지 않은 바람 속에서 읽히게 되었다. 그의 일상들. 지나온 기억. 그것들이 채우는 일기.

그의 소설은 무채색 톤 같다. 그리고 그안에 숨은 정을 나는 안다.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이제는 안다. 태도는 시니컬해도 시선은 다정하다. 정이 많다.

그리고 힘이 있다. 종이에 박힌 글자들이 일어서서 나를 덮친다. 별거 아닌 문장들이 나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나는 무너진다. 기꺼이. 기쁘게. 내가 이런 문장을 겪은 것은 행운이라 여기면서. 나를 흔들고 일깨우고 부끄럽게 만들다가 위로하는.

앞으로도 사랑할 에세이. 누군가 에세이를 읽고 싶다 하면 주저없이 이 책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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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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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청색의 하늘과 바다는 경계 없이 서로의 살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가없는 수면과 둥근 허공을 막막하게 아우른 짙은 푸른빛을 바라보며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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