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문득 라오는 깨달았다. 그는 사후 세계도 내세도 믿지 않았다. 이것은 속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과 무관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이 도시를 증오하고 있었다. 라오는 이 전화가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기를, 누군가의 가슴을 무참히 찢어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두운 사람을 반기는 조직은 없다. 불행한 사람은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겼어야 했다. 작위적으로 보일지라도 밝게 웃었어야 했다. 나중에 알려질지언정 나서서 눈물까지 보이며 털어놓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무탈하고 무고하며 건강하고 씩씩해서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으며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원만한 사람입니다.’ 회사가 듣고 싶었던 메시지는 그런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허세나 허풍일지라도.
여자도 그들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이쪽으로는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인생에 딱 한 번이면 족했다.
슬픔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드세게 두 사람의 삶을 틀어쥐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런 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슬픔과 상실감 역시 아이가 남긴 흔적이었다. 정희는 차마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거나 아이를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은, 그런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형사의 눈빛이 흐려질 때마다 정희의 감정은 가파르게 무너졌다. 제대로 설명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감에 그녀의 가슴이 조여 왔다.
그녀는 빛 속을 터덜터덜 걸었다. 삶이 또다시 그녀의 의지나 욕망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단단해지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맷집조차 만들지 못했다. 사나운 운명이 정희에게 남긴 것은 트라우마와 두려움, 그리고 그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초라한 자기 연민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과 불행을 범죄의 알리바이로 삼는 것도 일종의 중독이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누군가의 불행을 빌고 또 비는 끔찍한 밤들이 지나갔다. 두 번째 공여자는 뜻밖에도 빨리 나타났다.
정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도 확률적으로도 희박했다. 그녀의 삶이 그런 판타지로 작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희는 문득 억울해졌다.어째서지? 한 번쯤은 그래도 되잖아. 인생에 딱 한 번쯤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대부분 간과했다. 하지만 값없이 베푸는 친절이었다.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지적해 대며 상대를 무안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공 기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 공 기사는 마음에 일어나는 거스러미를 뚝뚝 잘라 버렸다. 알면서도 반백 년 넘게 고치지 못했다. 여태 못 했으니 앞으로도 못 할 것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부모는 자식을 맹신한다. 그렇다고들 했다. 철식의 부탁을 받았을 때 공 기사는 죽은 아들을 떠올렸고, 그 눈먼 믿음을 흉내 내고 싶었다. 철식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공 기사의 아이는 유순했다. 그 애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아니, 사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기억을 제 마음대로 뒤바꾼 것인지도 몰랐다.
혜순은 딸이 있을 종합병원 장례식장 입구에 서서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리춤에 문질러 닦았다. 손을 잡아 줘야 할 테니까. 더 이상 아이의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지만 아직 삶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딸에게 말해 줘야 할 테니까. 혜순은 여기, 너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 줄 사람이 있다고, 너는 내 딸이라고,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오래 너를 그렇게 불러 온 여자가 여기 왔다고, 딸의 두 손을 단단히 붙잡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딸을 볼 면목이 없었다. 딸의 삶에 비하면 그녀의 인생은 너무 순탄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부당하고 가혹했다. 하지만 혜순에게는 그것을 거둬 갈 능력도 지혜도 없었다. 이런 삶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혜순은 차마 딸을 낳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응어리진 가슴을 치며 혜순은 겨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정말 끔찍한 사람은 그녀가 작성한 기사 바깥에 있을 거였다. 내연녀를 살해하고 자살(하며 노인을 객사하게)한 김 씨의 아내.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머리가 반 이상 날아가고도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까진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죽지 못한 자들의 숙명이니까.
자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먹어야 했다. 너무 기력이 없으면 잠조차 잘 수 없다. 삶이 아직도 보고 싶지 않은 속살을 드러내 가며 그녀에게 뭔가를 가르쳐 줬다. 이건 몰랐지? 이것도 몰랐을 거야.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그렇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30년 넘게 살면서 많은 약속을 해 왔다. 대부분 지키지 못하거나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녀가 지금껏 살면서 파기해 온 약속들 중 최악도 아닐 것이다.
아내가 그런 결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너무 살고 싶은 마음은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과 한 끗 차이라는 것.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기대 볼 수도 있겠죠. 사람들은 대체로 내게 다정해요. 내가 너무너무 불행하니까. 나를 동정하면서 아직 자기들이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안도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결국엔 다정했던 사람들도 내 슬픔에 진절머리를 내게 되죠." "……."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남은 시간이 너무 길어요."
현실 세계에서 발을 떼고 있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겁박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발을 잡아당겨 현실을 딛고 서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철식은 지난 3년간, 자신의 삶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던 죄책감과 책임감이 무지와 착각의 소산일 뿐이었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느꼈다.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와 자신의 대나무밭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너와 비슷한 아픔을 겪어 본 적이 있어. 나도 그만큼 아팠어. 들어 보면 공감의 근거는 희박하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는 것뿐이다. 정말 끔찍한 건 그런 무례함이 다정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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