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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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넘게 붙들고 있던 책이다.

어렵다기 보다는 온전히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워

자주 멈추며 곱씹어서 읽게 되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가장 많은 포스트잇이 붙은 곳은 6장 도덕성이었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곳은 5장 신앙이었다.

내가 최근에 봤던 레이디 버드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봤고,

극 중 카톨릭계 고등학교의 학생인 레이디 버드의 감정이 잘 읽혔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수업에서 수녀님은

‘대표적 신학자인 오거스틴과 아퀴나스와 내가 좋아하는 키르케고르...

아, 그의 러브 스토리를 들으면 너무 멋져서 다들 기절할걸?’ 라고 언급하는데

이 책 240-242쪽 7장 사랑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

자주 갸우뚱 하며 읽었던 부분이었고

특히 파혼 이후의 그의 행동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와 사랑에 관한 내용은 우선 제쳐두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부분,

깊이 공감한 내용 위주로 다루려고 한다.


삶은 낭만적인 여정이 아니라 힘겨운 고행이라는 사실을,

실존주의자들이 솔직히 인정하고 다루었기 때문에

나도 저자와 같은 이유로 그들에게 끌렸다.

그리고 단순한 불평불만에 넋두리를 늘어놓지 않고

삶을 선물로 보는 관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고든 마리노가 쓴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초반에 실존주의적 지혜를 동원해서도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었던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실존적인 지혜들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이

피부색과 성별의 차이 없이 모두에게 적절한 지침이 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과연 동일하게 똑같은 유형의 과제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키르케고르는 그렇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했고

저자는 이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가령 흑인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되려면,

백인보다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악의적인 상황과 의심하는 눈빛을 이겨내야

비로소 자신에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허락되지 않는 성찰의 공간에 자신들은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가 때로는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본질적인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실에 의거해 행동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p. 47-48

절망에 빠진 사람은 ‘무엇인가’ 때문에 절망한다. - 그 순간에 진정한 절망은, 즉 진정한 형태의 절망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무엇인가’ 때문에 절망할 때, 그는 실제로 ‘자신에게’절망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

p. 91

6월은 내게 가장 힘든 달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절망을 자꾸 곱씹어야 하는 상황을 만든 한 가지의 일로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2년 간 많은 물을 길어와 비로소 깊고 잔잔해진

이십 대의 생활을 가진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올해의 목표를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잡고

미뤄두었던 일을 꾸준히 하는 것, 즉 나의 세계 속 방대한 바다의 일부를 빙하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6월은 없는 달처럼 보냈다.

운동도 가지 못했고 겨울잠 자듯 이불속에 오랜 시간 있어도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외주 작업이 두 건이나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그토록 열심히 했던 공부를 손에 놓았다.

지각을 할까봐 뛰는 일도 없었고

그 일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건 멈췄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하면,

주일 이상 지속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심리학적으로 불길한 징후로 생각하라는 주장이 많지만,

그렇다고 당사자가 차분하게 앉아 묵상하며 그 감정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p. 97

현실 세계에서 허둥대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거울 속에서 용감하는 척하는 친구들까지

“바닥까지 떨어져야 새롭게 시작하며 더 나아질 수 있어!”

라고 단언하는 소리를 적잖게 들었다.

그러나 바닥은 없고,

우리는 항상 더 깊이 추락한다는 걸 알고 있던 키르케고르는

“공허함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그 현기증에서 최후의 기분 전환을 모색하려는 것이 우울의 소심의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성실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정신차려! 우울이 절망으로 발전하는 걸 용납하지 마!”

라고 소리칠 것이다.

p. 100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정말 뼈저리게 공감했다.

물론 지금도 바뀐 건 없다.

누군가를 겁먹게 하는 건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자주 날 것이다.

고통에 굴복할 때 우리가 하찮은 존재라는 자각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가 밀려온다고 패링턴은 말했다.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나의 일이 되었고 앞으로도 신경써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러한 자각이 에너지를 주진 않았다.

생각만 많아질 뿐이고 몸을 움직이면서 놀아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불면증을 혹은 겨울잠을 고치려 애를 썼다.

나를 뒤흔든 그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다.

그가 쓰러져도 나는 함께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하나 배웠다.

그래도 앞으로 부디 내가 넘을 수 있는 적당한 양의 문제들을 보여주면 좋겠다.

내가 지나치게 강해지고 철들 필요가 없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우리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명확히 해야 설득력이 있다.

나는 미네소타에서, 그것도 주민들이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자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며,

자신은 요가 수업이나 교회에 나가는 구역에 살고 있다.

이런 성향을 ‘미네소타 나이스’라고 일컫는다.

예컨대 당신이 어떤 사람의 집에 들려 생일 선물을 준다면,

십중팔구 당신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사 카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미네소타 사람들조차 ‘미네소타 나이스’라는 말로

‘미네소타 아이스’를 감출 수 있을까 의심한다.

달리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미네소타 사람들도

반듯한 행실과 예의 바른 행동이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p. 135

내가 ‘진정성’에 대해 고민했던 내용의 핵심을 잘 짚어주었다.

키르케고르는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 반듯하고 충직한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성실하려면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새롭게 알아야 할 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성 또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한결같은 삶을 산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가식적인 행동을 삼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도 결코 가식적이진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의견에 냉담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는 그들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진실하다는 것을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니체와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생각에,

우리는 문화와 감정, 경험과 평가 등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존재이다.

우리는 이런 혼합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창조해낸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 다를 바가 없다.

-

진정성이 버킷리스트나 자아실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당신은 모든 잠재력을 발현해서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잠재력을 발현한다고 당신이 진실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 진실한 존재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 즉 신이 당신에게 의도한 자아를 뜻한다.

-

하지만 영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키르케고르는 진정성에 대한 다른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전통적으로, 지식은 ‘옳은 것으로 입증된 믿음’으로 정의된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옳고 그름’과 ‘입증’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또 키르케고르에게는 ‘어떻게’가 ‘무엇’만큼이나 똑같이 중요하다.

어원적으로 말하면, 라틴어와 독일어 모두에서 ‘진정성’이란 개념은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뜻과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p. 146-148

가령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아닌,

그 의견을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과 관련짓고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와 저자는 그 믿음을 신과 관련짓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두지만,

나는 관계에 대한 믿음으로 보았다.

그래도 자아에 대한 내용은 위와 마찬가지로 동의한다.

키르케고르는 자아를 개별적인 것으로 보고

보편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문도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만 언급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생의 경이로움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기 때문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학문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p. 178-179

어떻게 이렇게 세련된 표현으로 자아를 정확하게 정의했을까 싶다.

그가 옳다면, 자아에 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정의를 기다리기보다

당장 우리 자신이 되려는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키르케고르의 경고처럼 “첫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개개의 인간이므로,

개개의 인간이 되겠다고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독교를 믿는 키르케고르와 저자는 하느님과의 관련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진정한 자아도 배제될 수 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한 의견은 천차만별이고 나 또한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교리와 체제에 묶인 특정 종교에 회의감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든 건 사실이다.

여러 번 읽었고, 물론 계속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종교와 정치는 친한 사이에서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멀리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키르케고르는 필명을 사용한 글에서 독자의 삶을 편하게 해주기보다

더 힘들게 하려고 깃펜을 잡았다고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글을 쓰려고 하고

불편한 영화를 찾아보는 이유와 비슷해서 반가웠다.

우리가 지적으로 성숙해지고 도덕적인 문제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

삶이 점점 더 까다로워진다.

피할 수 없으면 잘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내용은 도덕성에 관한 내용에 나오는데,

이 장에 포스트잇을 많이 남긴 건

키르케고르가 정리한 도덕성의 개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고

니체가 왜 유명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건강하다는 것을 체력과 정력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에게 건강한 사람은 자유로운 영혼,

즉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태양계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그곳에서 그들을 찾아야 한다”라고 묘사했다.

그처럼 자신을 스스로 규정한 사람은

“대기가 없는 별이다.

안쪽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는

바깥쪽에서는 순전히 겉으로만 차갑고 싸늘하게 보인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자부심을 등에 업고 어리석고 타락한 파도를 이겨낸다.

그는 그런 상황을 혐오하며 그들로부터 멀어진다.” 라고 덧붙였다.

대부분 불멸의 지성이 그렇듯이

니체도 인지 부조화를 용인할 능력이 있었다.

니체는 근본주의적 무신론자였지만,

진실한 신자들이 믿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노예 반란이 자체의 결함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내면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인정했다.

모험과 정복을 꺼리는 사람들도 노예 반란 이후로는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모험을 추구하고 시도했다.

-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니체는 민주적 가치와 결부시켜 노예 반란과 노예 도덕이

우리를 허무주의로 밀어낸다고 판단했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두 극단과 두 관심사,

즉 노동과 쾌락, 일과 오락만이 존재하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19세기 말, 니체는 인간이 권태에 빠져들고,

‘말종 인간’처럼 ‘측은한 안락함’에 불과한 것-

예컨대 슬리퍼, 평면 텔레비전, 액션 영화-을 갈구한다고 묘사한다.

문화가 더욱 개화되고 관료화되자,

지독한 합리주의자이며 원조 페미니스트인 존 스튜어트 밀도 똑같은 불만을 쏟아냈다.

p.204-205

니체는 협력을 미지근한 이상보다 개인의 위대함과 힘, 경쟁력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치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더 많은 그의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우선 도덕의 계보학부터 읽어야지!

니체는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철학자였는데,

우리가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육체적 용기와 도덕적 용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빠진 상황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쨌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 적이 있는 사람과 협력할 것이다.

니체는 언어학적 조사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내가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 이유 중 하나다.

도덕과 관련된 표현들의 의미 변화를 분석해서 가치관의 변화를 추적했다.

예를 들어 선한 것이란 단어에는 편화와 관련된 함축이 있지만,

과거에는 전쟁과 관련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밀을 원조 페미니스트의 수식어를 왜 굳이 붙였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것도 6장 도덕성에서 언급되었고 사랑에 관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밀과 해리엇의 사랑은 마음이 뭉클하지만,

19세기 여성은 참정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영국 사회에서 살았다.

여권을 신장하는 건 기득권인 남성의 입장에서 득이 된다는 그의 설득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본다.

양성평등의 실현과 인류애적인 가치가 아닌

권력을 약간 양보해야 우리에게 이롭다는 것,

경제학적인 관점에서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권력 중심적 해석이 당연하지만,

21세기에 글을 쓴 고든 마리노는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해봐야했다.

저자가 직접 글을 쓴 건지, 번역에서 바뀐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한 여자를 집사람으로 읽히도록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총명함을 자만하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어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의기양양해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속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우리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때는 속지 않을 것일까?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속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써 속을 수도 있고

진실인 것을 믿지 않음으로써 속을 수도 있다.

p.43-44

내가 생각한 이 책의 최고의 문장이다.

앞으로 자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요하다.

또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언급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문제이지만,

인종차별과 억압이 그런 사랑을 방해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정신의 삶은 정지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해야 하고

그 후에는 의지는 어떻게 인식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문제가 뒤따른다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풀어놓은 글을 읽었다.

나를 이루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과거로 자꾸 돌아가는 내가 두려워지지 않도록 힘을 보태주는 글이었다.

삶의 굴레가 지겹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어떻게 잘 나아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잘 돌아볼 수 있을지를 알려주었다.

단순히 키르케고르를 소개하는 연구서가 아닌

저자가 자신의 생각과 삶을 전달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사상가의 의견을 곁들여서 재미있게 읽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인 것 같았고

내가 느낀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런 거라면 부담 없이 계속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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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9-07-0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과 시작 전에 본 리뷰에 끌려 읽다 보니 어느 새 종 칠 시간이네요. 탐구하는 독서의 힘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