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비판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뉴라이트 단체가 낸 저작물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두 권의 뉴라이트 비판서를 먼저 읽었다. 사실 이렇게 어떤 대상에 대한 (그것이 좋건 나쁘건) '실체'보다 '타인의 견해'를 먼저 접하는 것은 자칫하다간 '타인의 견해'를 마치 나의 생각과 주관인 것 마냥 고착될 위험이 있기에 상당히 안 좋은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뉴라이트 비판]과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두 권의 뉴라이트 비판서를 읽기 전에 상당히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 너무나도 다른 단체의 저작물을 내 돈 주고 사서 보는게 아직까지 매우 아까운 것이 사실이고,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책을 빌려보는 방법도 있으나, 사실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_-;

분명 나와는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단체이지만 그럼에도 뉴라이트에 관해 긍정적인 면을 억지로 하나 꼽아보자면 이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담론이 다시금, 아니 최초로 활기를 띠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광복 이래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담론이 이렇게 '균형적인' 위치에서 갑론을박을 띤 적이 있었던가 싶다.

반공은 종교였고, 독재에 맞서는 담론은 '불법'이었다. 그렇기에 담론투쟁은 좌파 내에서 한정된 '그들만의 리그'였을 뿐이다. 아직도 꼴통들은 반공을 들먹거리며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 하고 있지만. 어쨌건 이들은 다시금 우리 사회, 정치 전반적인 분야에서 활기를 띠게 해주었다. 이들이 그나마 기존의 수구들과 다른 점은 최소한의 '논리'는 있다는 점이다. 뉴라이트 대표격인 이영훈의 학자적 자질은 말할 것도 없고, 신지호나 안병직 등 현재 뉴라이트를 대표하는 간판들은 결코 '반공'만 무조건 들이대던 예전의 그 찌질한 수구들과 동급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 이건 최소한의 예의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논리'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보수를 위시한 수구세력들이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극단적 주장과 이념 공세로 인해 젊은 층에게 정치 혐오증을 넘어선 정치적 무관심을 심어주어 정치에 눈을 돌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한나라당을 위시한 수구세력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 젊은 층들의 크나큰 관심에 소위 말하는 '개혁정권'들이 부합하지 못한 실망스러운 정책 방향과 메이저 언론 조,중,동의 여론몰이도 단단히 한 몫 한 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수세에 몰릴 때 극단적인 단어선택과 색깔 공세론을 펼친 쪽은 주로 수구세력들이었다)

따라서, 뉴라이트를 비판을 하기 위해선 보통 수구들을 대응하는 방식처럼 '지나가던 개가 짖나' 따위의 무관심으로 일관해선 안 된다. 이들은 '논리'가 있기 때문에 '비난'이 아닌 '비판'이 필요하고, 그 논리 속에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이들을 자신들의 지지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실제로 젊은 층들 사이에서는 반MB 정서 못지 않게 뉴라이트의 지지자들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그래서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은 나는 수준이하의 비판서라고 생각한다. 일단 현 한국 사회의 절망적인 인문, 사회과학 도서 분야에서 갖은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좋은 책을 출간해주고 있는 돌베개에서 이런 수준이하의 비판서가 나왔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하고 싶다.

김기협은 한가지 명제에서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고, 뉴라이트의 저작물과 그들의 행태에 대해 꼬치꼬치 비판을 할 때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또다시 이 한 가지 명제로 돌아와 그들을 비판한다. 이 한가지 명제는 이 책에서 뉴라이트를 비판할 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명제가 도출된 어떠한 자료나 근거도 이 책에서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커다란 중심추다.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 아니, 세상에!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라니! 사회의 총체적인 조화를 중요시하는 '좌파'의 입장에서도 이는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요새 그 폐단이 속속들이 들어나서 많은 '안티'들을 양성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사상의 중심 아닌가! 그래. 이건 쉽게 말하면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홀로코스트를 탄생시킨 우생학으로 발전한 그 위험한(!) 전제 말이다. 김기협은 옳지 잘 걸렸다. 하고 책 내내 '얘네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래요~' 라면서 신명나게 쏘아댄다.

자신의 일기에 쓰는 글은 잘못된 주장이건 객관적인 주장이건 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서에서, 그것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의견을 펼칠 때에는 여러 사람이 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나와 뜻이 같은 사람들도 있겠고 나와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게다. 중요한건, 나와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서 비판을 할 땐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제일 먼저 검토한 것이 안병직과 이영훈의 대담집 [대힌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로, '뉴라이트 사관'의 대표 두 사람의 담론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과연 이 두 사람을 '역사학자'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이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의 일이었다. 역사란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안병직과 이영훈, 이 두 사람을 '역사학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상당히 민감한 말이다. 당사자에게도 그렇거니와 안병직과 이영훈의 '시각'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김기협의 이 말처럼 아예 직업 자체를 부정하는 대담하고 치기어린 발언은 굉장히 불쾌하고 위험한 말이다. 이렇게 당당하고 대담하게 화두를 던져 놓았으면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이유'가 나와야 될 것이다. 그런데 김기협은 바로 뒤에 '역사란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이라며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고 있다.

물론, 뒷부분에 "안병직과 이영훈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해놓고 그 위에서 역사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라고 '그들을 역사학자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이유가 나오긴 한다. 좋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들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해 놓았다는 말인가? 자신이 그렇게 자신있게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그들의 저서에서 발췌한 부분 없이 김기협은 '얘들이 인간은 이기적 존재래요' 라고 단정지은 채 부시먼족과 홉스와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뒤에 이들이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이는 김기협이 그들을 ‘까기’위해서 발췌한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의미로 쓰인 것은 문맥상으로 따져봤을 때 전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꼬투리 잡기 아니면 무엇인가. 너무 졸렬하고 치시한 비판 방식이다) 과연 이러한 비판이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가? 혹시 김기협은 자신의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를 읽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풀어나가는 것일까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김기협의 어처구니없는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참으로 근거가 없는, 감정에 치우친 비판을 이 책에서 자주 보여주고 있는데, 일례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 연평균 3.6%의 경제성장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연평균 3.6%의 경제성장률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라며 하는 말이 "오늘날처럼 산업화가 이뤄질 만큼 이뤄진 상황에서도 연 5% 이하로 성장률 목표를 낮추는 것을 놓고 온 국민이 서운해하는 판인데, 아무것도 없던 출발점에서 3.6%가 높은 성장률이라니?"란다.

참... 할 말이 없다. 온 국민이 연 5% 이하의 성장률 목표를 서운해 한단다.

한국은 경제성장률 환상에 빠져있는 나라다.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그렇게 욕하면서 대선 후보들은 연 5% 이상의 군사독재시절의 경제성장률을 약속한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아니면 무엇인가. 실제로 이제 더이상 한국과 같은 선진국에 접어든 국가는 이러한 경제성장률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제 웬만한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경제성장률을 앞세운 자기 포장은 먹히지 않는다. 김기협은 웬만한 사람이 아닌 것일까? 아무리 '비판'을 한다한들 우리나라 정치인, 대선후보들의 매번 반복되는 근거없는 과대포장을 들먹이면서까지, 마치 그것이 온 국민이 염원하고 있는 의견인 것처럼 내세워야 할 만큼 그렇게 '무기'가 없는 것인가?

이어서 나오는 그의 주장은 참 가관이다.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 경제가 이룩하던 연평균 7~8%보다도 높은 성장률이 근대화 출범 시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중략)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산업화가 수십 년간 연 4% 미만의 성장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제 통치가 성장을 도와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이런 용감무식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경제라고는 전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이 주장은 말이 안 된다. 경제성장률의 기준을 '산업화의 정도'로 보는 시각도 그렇거니와, 이제는 하다하다 '비판'을 위해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전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박정희 시절의 혁명적인 경제성장률을 거론한다. 전세계적으로 극히 '예외'인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률을 들먹이며 '여기에 비교하면 3.4%는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한다. 김기협은 기적이 무슨 뜻이고 신화가 무슨 뜻인지 알긴 알고 있는 것인가?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내용을 떠나 '민족정서'를 자극하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평생이 지나도 우리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리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 아무리 논리정연하다 그래도 민족정서에 반하는, 굴욕의 역사를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론의 이름과 내용 들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서'에서는 비판을 하려면 최소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주관적 생각을 펼쳐나가야 한다. 김기협은 너무 감정에 의존해서 비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을 위해 들먹이는 근거들도 전혀 타당성이 없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근대화론이 분명 그 이론 상에 허점이나 이념적 성향이 내포되어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다니... 수구 세력들이 진보를 비판, 비난하는 태도와 다른게 뭔가?

이 외에도 이 책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 너무나도 많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들어보자. 역시 경제성장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김기협은 또다시 감상이 빠진다. "경제 통계의 한 페이지를 보며 허망한 느낌에 빠진 일이 있다. 1960~1990년간 한국의 총 경제성장률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가 거의 같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통계였다. 이는 한국의 고속성장이 인권의 극심한 희생을 필요로하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자연스럽게 거치게 되어 있는 경제발전의 한 단계였음을 시사해준다."

이건 대체 뭔 소린가? 아하. 이래서 김기협은 한국의 고속성장이 기적적인 것이 아니니 일제시대 경제성장률은 낮은 것이다라고 한건가? 참 웃기는 소리하고 계신다.

동아시아의 일부나라, 아니 그래 김기협의 말마따나 여러 나라의 1960~1990년간 경제성장률이 우리나라의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고 해서 이것이 '동아시아 지역의 당연한 경제발전의 단계'라는 결론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단지 경제성장률의 통계만으로 그것이 당연한 경제발전의 단계라고? 경제라는 것은 정치건 문화건 사회의 모든 분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섬세한 분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단순히 다른 주변 여러 국가와 대비해서 평균화, 단순화 시키는 것일까?

박정희 권위주의정책의 호불호를 떠나서 인권유린이 없었어도 경제가 지금처럼 발전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분명 근현대사의 비극이고 내가 박정희를 개새끼로 보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지만 그래도 난 김기협의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적 발전이 어떻게 '우리날 경제발전의 당연한 단계'임을 시사해주는가. 제발 좀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해라.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 김기협의 시각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말했다. 김기협과 나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이 뿐 만이 아니다. 쓰기가 지칠 정도로 많다. 물론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말 그대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보고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심한 말로 “네가 김기협보다 잘난게 뭐가 있는데 어디서 아는 척이냐”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제 값을 주고 구입한 책이라면 이정도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격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불만인 가장 큰 이유는 돌베개라는 출판사도 그렇거니와 제목을 봤을 때 ‘이제야 제대로 된 뉴라이트 비판서가 나왔구나’ 생각했던 기대심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이 그렇게 '나쁜 책'은 아니다. 어찌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쁘다'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단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 이 책이 가지는 의의라고 할까. 그것은 수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뉴라이트라는 단체에 대해 감정적 접근이 아닌 이성적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내가 적었던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졌던 이유는 그의 주장이 감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비판'을 위한 기본의식의 부재라는 측면이다) 감정적인 시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 박정희, 한나라당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신랄하게 욕지거리를 날리는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극우파들과 똑같이 대응하는)수많은 사람들에 비해서 이 책은 그래도 어느정도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보며 참 아쉬웠던 부분은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뉴라이트 비판'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당위성이나 설득력이 너무나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뉴라이트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있고, 뉴라이트 저작물을 하나도 읽어본 적 없는 나와 같이 '뉴라이트 비판'이 백발백중 먹힐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장해체 상태인 나에게 있어서도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은 상당부분 의문이 들게 만들었으니... 걱정스러운 부분은 이처럼 허술한 비판서로 인해 뉴라이트 세력들이 오히려 을 얻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조금 다르다. 이 책에 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기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chael Jackson - This Is It (Deluxe Edition) [2CD 쥬얼케이스반] - This Is It 국내 오리지널 포스터(4단접지) / 24페이지 화보집 앨범 내 삽입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참나 진짜 징하게 울궈먹는구만.. 또나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진중권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식인답지 않은 '센스'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너무 배운 냄새를 폴폴 풍긴다. 현학적인 단어, 전문적인 단어들을 선택해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있어보이게 포장을 하고,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은 그저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 자격미달인 사람으로 치부하는 한마디로 허세에 쩔어있는 글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이들이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망각된 채 그들의 글을 읽는 대중들에게 돌아오는 건 '글을 통한 자기과시'라는 부정적인 시각인 것이다. 의사소통의 완벽한 단절.

반면에 진중권의 글은 쉽게 읽힌다. 진중권의 글이 쉬운 이유는 그는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한 두 번씩 오갔던 주제들, 혹은 인터넷에서 사소하게 재잘거리던 주제들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으로 우리에게 사물을 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가끔가다 날 선 글들 때문에 그의 의견이 대립되는 이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이유는 분명 나와는 반대되는 입장의 글이라도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아들기 쉬운 편한 언어로 구사하는 촌철살인의 미학. 진중권의 글은 그래서 참 좋다.

진중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바로 [폭력과 상스러움]이다. 물론 진중권의 소위 말하는 리즈시절이라 하면 독기가 파릇파릇 서려있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나,예술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많이 팔려나간 [미학 오딧세이]를 꼽을 수 있겠지만, 전자의 경우,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서슬퍼런 그의 칼날 때문에 약간은 읽기가 부담스러웠던게 사실이고, 후자의 경우, '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로선 그냥 싱숭생숭했다-_-

[폭력과 상스러움]의 컨셉은 꽤나 독특하다. 그가 독일 유학 시절 읽었던 신문, 잡지, 책들의 한 구절을 따와, 그에 맞는 주제들을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컨셉인가. 일단 '다독'을 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각 글들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글의 모티브가 되는 문장은 그리 쉬운 내용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문장을 토대로 우리에게 알아듣기 쉽게, 술술 읽히는 그 특유의 마법적인 글빨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 책에서 그의 글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느껴지는 번뜩이는 칼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언어유희는 과거보다 빛을 발한다. 그가 보헤미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보헤미안의 십계명이 있다. 대충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같이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라' 뭐 이런 내용이다. 물론 대책 안 서는 망나니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망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획일화, 규격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대한 통찰로써 이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을 유머스럽고 센스있게 꿰뚫어보는 지식인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그가 우리 사회의 '음지'를 살펴보는 시각은 '진중권의 무조건 안티'들마저 사로잡을 정도로 상당히 통찰력 있는데 일례로 "레드컴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잡는 극성스런 반공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타인을 향해 "나는 빨갱이가 아니예요"라고 고백을 시끄럽게 하는 방식, 그것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공격적인 방식의 고백. 그것이 레드컴플렉스다" 무릎을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시원스런 통찰이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말그대로 살아 숨쉰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자기과시'라는 지식인들의 벗기 힘든 무거운 갑옷을 거침없이 훌훌 벗어버렸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대중들을 향해 읽히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다분히 넘쳐흐르는 생동감 있는 녀석들이다. 근작 [호모코레아니쿠스]에서는 무뎌지진 않았지만, 센스와 위트가 약간은 과거보다는 덜 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을 너무나 가슴 뜨겁게 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시간강사' 진중권의 교수 해임에 열 뻗치고 천불이 나는 이유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위트있는 사람이 '먹고 살' 걱정 때문에 더이상 이런 글을 쓰지 못하고 현실에 부딪쳐 덜컥 '철이 들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가 철이 드는 순간 그의 위트는 위태로워진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이런 철들지 않은 망둥어 같은 사람들까지 돈에 잠식되어 생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것, 그것은 바로 진중권 같은 철들지 않은 개구쟁이, 영원한 보헤미안의 부재이다.

-최근 시민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이름 없는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별자리는 그림이면서 그림이 아니다. 그래서 시민들의 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로이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시민들이여, 어둠에 묻혀도 빛나기를 멈추지 말라. 세상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가 되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穀雨(곡우) 2009-10-1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에 대한 해석과 시각이 남다르시네요.
내꺼님의 시원시원하게 풀어 쓴 글도 인상적입니다.
잠시 머물다 갑니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이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이미지 메이킹이든 어쨌든 경제학자로서 선망을 받으며 수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지식인 상'이라는 이미지가 확립되기까지는 그 무엇보다도 수많은 정계의 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은 그의 올곧은 소신과 신념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운찬이 총리로 지목됐다는 소식을 듣고 별반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전 서울대 총장'이라는 상징적 뱃지가 우리나라에 휘두르는 파워가 어디 좀 막강한가? 행여나 정치판에 뛰어든다고 해도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 쪽에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지금의 행적을 보면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약간 실망을 했을 뿐이다.

'착한놈 vs 나쁜놈' 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분류에 근거해 실망을 가졌던 건 아니다.
민주당이 착한놈도 아닐 뿐더러, 국민의 신임을 얻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나쁜 놈도 아니다. 비록 내가 한나라당을 경멸하는건 (민주당도 똑같지만)뚜렷한 정치적 지향방향 없이 오로지 '이념'만으로 막강한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지 그들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유린해서가 아니다.

어쨌건 다시 정운찬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정통 케인스학파 경제학자인 정운찬이 대체 현 정권에서 소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정운찬은 4대강 정비를 위시한 토건주의가 진심으로 한국형 뉴딜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신년강좌에서 MB정부의 무분별한 토건지상주의를 비판했던 그가 현 정부 총리를? 참 기가 차는 일이다.

정운찬의 정치 참여만큼 이 책 [지식인의 죽음]의 커다란 줄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오히려 선진국에서는 그 모순을 점차 극복해 나가고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로 완전히 예편된 한국에서 '지식인'이라는 (이제는 사라진듯한)'담론'의 개념에 가까운 특수층을 조명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인의 죽음, 이는 더이상 상징적인 의미의 은유적 표현을 넘어서 한국 정치와 경제의 '색깔'을 좌우하는 커다란 '사건'이다.

이 책은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시리즈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연재되었을 땐 접해보지 못하고 비록 이렇게 책으로 접하고 있지만, '기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기획은 저널리즘에 입각한 그야말로 보기 드문 '기획기사'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여러 방면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경향신문, 한겨레신문이지만 이런 기사처럼 담론투쟁을 뛰어 넘어 진보와 보수(라고 자청하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사들을 조중동에서 보기에는 하늘에 별따기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참여가 결코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공적 참여, 정치적 참여는 민중들에게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견의 설파나 직접적인 참여로 인해 시민사회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문제는 '참여'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정치에 투신하는 그 순간부터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던 그 시절에 자신의 학자적 소신과 앎 등이 깡그리 무시된다는 사실이다.

군부독재시절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란 명목을 그나마도 희마하게 이어간 것은 대학생들의 깨어있는 정신과 시국선언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지하세계에서의 활동이 큰 몫을 했다. '시대정신'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와 그들의 글은 대학생들에게 용기와 신념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 이들의 말과 글은 실종됐다.

이 책에서는 지식인이 지금처럼 몰락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사회 전반적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때 지식인의 몰락, 즉 죽음은 "근대가 창출한 허위성을 폭로하는 탈근대주의"에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지만, 오늘날만큼 '진실'이 천대받은 시대에는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의 진실"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탈근대주의가 가르쳐준 교훈이, 항상 '지식'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설파하려고 하던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회의감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할 수가 없다. 근대의 허위성이 말 그대로 '환영'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언젠가는 걷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근대의 허위성이 탈근대주의로 인해 무장해제 되었다고 해서 지식인들이 급격히 무기력하게 변했다면 그만큼 허약한 '신념'이 진심으로 시대정신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식인의 몰락을 조금 더 구체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본다면 '외환위기'를 꼽는다.즉, 지식인의 담론이 해제되고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가 외환위기라는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중심적, 가치중심으로 재편됐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버리고, 사회를 물질중심적으로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직접 활동하는 놀라운 실천성(!)마저 보여준다.

사실 지식인들의 권력 욕심은 그리 낯선게 아니다. 조선왕조 때부터 벼슬이란 것은 학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지식인의 죽음'에 더욱 서글퍼지는 것은 반공주의, 권위주의 체제 내에서 그 모든 과거의 '타락상'을 따르지 않고, 몸소 자신의 지식을 현실에 투여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재야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지식인의 죽음만큼 한국 사회의 현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래도, 그럼에도 우리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고병권의 말에 잘 나타난다. 찡하고 감동적이기까지한 고병권의 마지막 말로 글을 끝맺음할까 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데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 편에서는 곧바로 통치가와 자본가일 것이가, 다른 한 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방전후사의 인식 2 -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구조의 실증적 연구 오늘의 사상신서 93
강만길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역사에 대해 정의하길, "역사란 과거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맞게 조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른 어느 학문들 보다 경제, 정치를 비롯한 전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를 두고 뜨거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이유는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장 강력한 불멸의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최종 목표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꿈이겠지만.  

 이렇게 권력의 성향에 따라 끊임없이 조작되는 역사라는 놈에게 '사실'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그저 과거의 기록을 역사학자의 취향에 따라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은 더없이 중요하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또라이트, 아니 뉴라이트 같은 '합리적 보수'를 위시한 이들이 역사를 날조하려 하는 이 시점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역사의 관점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더군다나 (초판이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해방전후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다양한 결과물의 모음이 [근대를 다시 말하다]를 제외하면 극소수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특별하다. 

 이 책은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1, 2권까지 읽은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책의 구성은 여러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이 해방전후사에 벌어진 정치, 경제, 법률, 문학과 같은 사회의 총체적인 분야에 관해서 세밀하게 분석하는 논문 형식의 묶음집 형태를 띠고 있다. 미지의 개혁이었던 해방전후의 토지개혁에 대한 개괄적인 분석이나, 광복 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먼저 자발적으로 형성된 정치조직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이야기, 친일문학인들의 분석과, 비극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반민특위의 슬픈 종말, 해방 후 공산주의의 발발 환경 등.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해방 직후의 문학분야와 노동운동 분야이다. 

 해방 후 문학분야에 관한 글은 1권에선 염무웅과 임헌영이, 2권에선 김윤식이 각각 다루고 있는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시각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순간의 신의 머무름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이 말은 비록 해방 직후 열린 '전국문학자대회'를 가리켜 한 말이지만 해방직후의 폭발했던 창조성을 상기해본다면 그 시절을 노래하는 말이라고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김윤식이 쓴 이 문단보다 그 시절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아 그대로 옮겨 본다. 

 해방공간은 서사시에서 비극을 거쳐 플라톤 철학으로 넘어가는 그리스사회의 공간과 흡사하다. 현상과 본질이 완벽한 화해상태이던 서사시(서사적 상태)는 8.15 해방의 찾아옴에서 확인된다. 그것은 신과 더불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은 한순간 우리의 눈을 멀게 한 뒤에 어느새 이땅을 떠나버렸다. 현상과 본질이 분리된 것이다. 그것이 비극(비극적 상태)이다.그렇지만 비극은 아직도 조금의 희망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영웅)의 죽음의 순간에 현상과 본질이 일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 문학자 대회는 비극의 상태라 규정된다. 그것은 한순간의 신의 머무름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약'으로 표현되듯 한순간의 일이고, 그 순간이 지나자 본질(이념)과 현상은 영영 갈려 서로 마주보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 삶의 원자로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된 세계에서는 본질이나 의미가 이데아들의 순수지적인 영역으로 피신하게 되는 것, 그것이 플라톤 철학이다. 우화라든가 신화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경우를 제하면 철학 속에서는 본질과 현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마주치지 못한다 

 해방공간이 문학사에서 남긴 폭발성은 결코 길지 않았다. 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문학은 산산조각이 났다. 미국과 소련이 땅을 갈라놓고 있던 그때, 정치적인 불순물 없는 순수문학은 사치였을까..? 문학은, 글은 현실을 투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로 인해 해방전후사에 남았던 것은 난도질당한 너덜너덜한 문학의 껍데기였다. 

 해방전후사의 노동운동은 나에게는 완전하게 신선한 내용이었다. 2권에서 성한표가 쓴 <9월 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은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주제임과 동시에 유럽의 노동운동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하나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다. 97년 노동자 총파업 이전에,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 79년 YH여공 투쟁 이전에, 70년의 전태일 이전에, 우리의 노동운동 역사에는 1946년 9월 총파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 9월 총파업은 한국 근현대사상 가장 처절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무려 200명의 경찰이 죽고, 민간인 1천여명이 죽었으며, 3만명의 인원이 검거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난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상당히 수동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이미지는 작년 촛불시위 때 어느정도 바뀌었지만 이것은 10~20대, 30대에 한정된 '사건'이었기에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 즉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혈기왕성하던 시대에 권위주의적 체제에 억눌려 지내왔던 탓이 크겠지만 굳이 정치적 성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동적인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아왔던게 사실인데, 이는 조선의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제시대, 해방후, 현대사의 사람들 역시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는 하나의 통계는 이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뀌게 해주었다.

"해방 후 1년간 1299건의 파업 발생, 26만7천명의 노동자 참가,  2331명 해고, 1090명 검거" 

 실로 어마어마한 파업 건수이다. 이는 물론 해방이라는 격변 속에서 국민의 열망과 국가의 대처가 불합치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막연히 수동적인 기성세대라는 편견만은 가지고 있던 나에게 이런 투쟁 건수와 노동자들의 파업 참가 숫자는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기본권'을 외쳤음에도 전혀 바뀌지 않은 현실이. 게다가 그때 그들이 그토록 외쳤던 건 유럽과 미국과 같이 노동환경의 질적인 개선이 아닌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사항일 것이라는 건 굳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즉, 다시말해 그들에게 파업은 단순한 임금협상, 노동자의 최후의 무기라는 선진화 된 개념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였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던져서 파업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노동조합. 8.15 직후 이들은 '정치투쟁'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오해할까봐 미리 밝히자면, 난 결코 전평의 정치투쟁 선언을 비난하는게 아니다. 모든 노동운동은 결국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에 점화선이 된 것은 해방 직후 제정된 '파업규제법'이었다. 살기 위해 파업을 하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주기는 커녕 법을 제정해 이들을 합법적으로 말아버리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미군정은 "민주주의적 노조의 발전을 장려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하고, 미군정청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 밑에서 '대한노총'이란 새로운 노동조합이 탄생한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굳이 말 안해도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전평은 박헌영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노리는 타겟 1순위였던 것이다. 

 1946년 9월의 총파업은 이때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전평의 계획적인 노동 봉기가 아니었다. 맨 처음에는 서울 철도국의 경성 공장에서 시작해 부산과 전남지구로 이어졌고, 전국의 철도노동자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서울의 전화국과 우체국, 전기주식회사, 부산의 전신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한다. 9월 말, 파업 참가 노동자는 남한 전체에서 무려 26만 4천여명에 달했다. 서울에서만 295개 기업에서 3만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한다. 

 생각해보라. 굳이 상대적인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이정도 파업 인원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창하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벌어질 수도 있는 역사적인 인원과 조건이었던 것이다. 전평이 볼셰비키였고, 박헌영이 레닌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말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더없이 충분했던 찰나의 순간'을 전평은 무능력한 지도부로 인해 날려버린다. 폭발적인 파업혁명 속에서 전평이 갈피를 못잡고 있을때, 대한노총은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개편하고 공장 경영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파업대책위원회와 제휴해 '총파업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빠른 시일 내에 파업을 파괴하겠다고 군정 당국자에게 충실하게 약속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나도 처참하다.... 장택상이 지휘한 2,100명의 경찰들은 9월 30일부터 경성공장의 모든 외곽선을 포위한다. 애국청년단원들과 대한노총원들이 농성장에 돌입해 1,400명을 검거하고 파업단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들은 전국으로 퍼져 미군정의 든든한 지원아래 삽시간에 파업단을 분열시킨다. 전평은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다. 지도자들이 대량검거되면서 사실상 해체되게 되고 대한노총은 이 틈을 타서 곳곳의 공장에 침투해 노동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노동운동' 본연의 역할과는 전혀 동떨어진, 권력에 야합한 더러운 이름 대한노총은 현재 '한국노총'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참으로 한스러운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사다. 그시대의 노동자들이 대단한 걸 원했었나. 하다못해 농지개혁법이라도 해방직후 제대로 제정이 됐었다면 그들이 파업이란 배수진을 쳤었을까. 겉멋들어서 그들이 파업을 한게 아니다. 내 배 부르자고 그들이 파업을 한게 아니다. 인간의 생존이라는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하고자 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파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졸개들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초전박살 내버린다. (더 웃긴건 9월 총파업 강제 해산에 가담했던 김두한 같은 새끼가 많은 이들에게 협객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씨발스럽다) 

 이후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완전히 죽었다. 1970년 전태일이라는 영웅이 나오기 전까지 노동자는 그저 기계였다. 전태일이 나온 뒤에도, 민주화가 된 후에도, 21세기에도 대다수 노동자는 기계처럼 산다. 우리도 유럽처럼, 미국처럼 존나 멋진 슬로건 내걸고 우아하게 협상하고 싶다. 망루에 올라가서 흔들거리는 목숨을 담보로 걸고 피터지게 절규하는게 아니라, 봉쇄된 건물 안에서 내 와이프, 내 동료가 목 매달고 죽었다는 소식에 피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투쟁이 아니라, 시원하게, 당당하게, 목숨을 내걸고 처자식을 내건 투쟁이 아니라 씨발 좀 멋스럽고 당당한 요구를 하고 싶은거다.  

 해방 직후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야기가 예상보다 너무 길어졌는데 성한표가 다룬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나에게 너무나도 뜻깊은 저작물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기성세대를 수동적인 기성세대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무력한 노동자들밖에 없었기에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는 전태일 혼자서 이룩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우리나라에도 진정 '노동자'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는 것 그 하나가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