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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2 -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구조의 실증적 연구 ㅣ 오늘의 사상신서 93
강만길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3월
평점 :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역사에 대해 정의하길, "역사란 과거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맞게 조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른 어느 학문들 보다 경제, 정치를 비롯한 전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를 두고 뜨거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이유는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장 강력한 불멸의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최종 목표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꿈이겠지만.
이렇게 권력의 성향에 따라 끊임없이 조작되는 역사라는 놈에게 '사실'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그저 과거의 기록을 역사학자의 취향에 따라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은 더없이 중요하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또라이트, 아니 뉴라이트 같은 '합리적 보수'를 위시한 이들이 역사를 날조하려 하는 이 시점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역사의 관점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더군다나 (초판이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해방전후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다양한 결과물의 모음이 [근대를 다시 말하다]를 제외하면 극소수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특별하다.
이 책은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1, 2권까지 읽은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책의 구성은 여러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이 해방전후사에 벌어진 정치, 경제, 법률, 문학과 같은 사회의 총체적인 분야에 관해서 세밀하게 분석하는 논문 형식의 묶음집 형태를 띠고 있다. 미지의 개혁이었던 해방전후의 토지개혁에 대한 개괄적인 분석이나, 광복 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먼저 자발적으로 형성된 정치조직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이야기, 친일문학인들의 분석과, 비극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반민특위의 슬픈 종말, 해방 후 공산주의의 발발 환경 등.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해방 직후의 문학분야와 노동운동 분야이다.
해방 후 문학분야에 관한 글은 1권에선 염무웅과 임헌영이, 2권에선 김윤식이 각각 다루고 있는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시각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순간의 신의 머무름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이 말은 비록 해방 직후 열린 '전국문학자대회'를 가리켜 한 말이지만 해방직후의 폭발했던 창조성을 상기해본다면 그 시절을 노래하는 말이라고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김윤식이 쓴 이 문단보다 그 시절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아 그대로 옮겨 본다.
해방공간은 서사시에서 비극을 거쳐 플라톤 철학으로 넘어가는 그리스사회의 공간과 흡사하다. 현상과 본질이 완벽한 화해상태이던 서사시(서사적 상태)는 8.15 해방의 찾아옴에서 확인된다. 그것은 신과 더불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은 한순간 우리의 눈을 멀게 한 뒤에 어느새 이땅을 떠나버렸다. 현상과 본질이 분리된 것이다. 그것이 비극(비극적 상태)이다.그렇지만 비극은 아직도 조금의 희망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영웅)의 죽음의 순간에 현상과 본질이 일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 문학자 대회는 비극의 상태라 규정된다. 그것은 한순간의 신의 머무름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약'으로 표현되듯 한순간의 일이고, 그 순간이 지나자 본질(이념)과 현상은 영영 갈려 서로 마주보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 삶의 원자로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된 세계에서는 본질이나 의미가 이데아들의 순수지적인 영역으로 피신하게 되는 것, 그것이 플라톤 철학이다. 우화라든가 신화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경우를 제하면 철학 속에서는 본질과 현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마주치지 못한다
해방공간이 문학사에서 남긴 폭발성은 결코 길지 않았다. 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문학은 산산조각이 났다. 미국과 소련이 땅을 갈라놓고 있던 그때, 정치적인 불순물 없는 순수문학은 사치였을까..? 문학은, 글은 현실을 투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로 인해 해방전후사에 남았던 것은 난도질당한 너덜너덜한 문학의 껍데기였다.
해방전후사의 노동운동은 나에게는 완전하게 신선한 내용이었다. 2권에서 성한표가 쓴 <9월 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은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주제임과 동시에 유럽의 노동운동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하나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다. 97년 노동자 총파업 이전에,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 79년 YH여공 투쟁 이전에, 70년의 전태일 이전에, 우리의 노동운동 역사에는 1946년 9월 총파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 9월 총파업은 한국 근현대사상 가장 처절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무려 200명의 경찰이 죽고, 민간인 1천여명이 죽었으며, 3만명의 인원이 검거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난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상당히 수동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이미지는 작년 촛불시위 때 어느정도 바뀌었지만 이것은 10~20대, 30대에 한정된 '사건'이었기에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 즉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혈기왕성하던 시대에 권위주의적 체제에 억눌려 지내왔던 탓이 크겠지만 굳이 정치적 성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동적인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아왔던게 사실인데, 이는 조선의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제시대, 해방후, 현대사의 사람들 역시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는 하나의 통계는 이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뀌게 해주었다.
"해방 후 1년간 1299건의 파업 발생, 26만7천명의 노동자 참가, 2331명 해고, 1090명 검거"
실로 어마어마한 파업 건수이다. 이는 물론 해방이라는 격변 속에서 국민의 열망과 국가의 대처가 불합치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막연히 수동적인 기성세대라는 편견만은 가지고 있던 나에게 이런 투쟁 건수와 노동자들의 파업 참가 숫자는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기본권'을 외쳤음에도 전혀 바뀌지 않은 현실이. 게다가 그때 그들이 그토록 외쳤던 건 유럽과 미국과 같이 노동환경의 질적인 개선이 아닌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사항일 것이라는 건 굳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즉, 다시말해 그들에게 파업은 단순한 임금협상, 노동자의 최후의 무기라는 선진화 된 개념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였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던져서 파업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노동조합. 8.15 직후 이들은 '정치투쟁'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오해할까봐 미리 밝히자면, 난 결코 전평의 정치투쟁 선언을 비난하는게 아니다. 모든 노동운동은 결국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에 점화선이 된 것은 해방 직후 제정된 '파업규제법'이었다. 살기 위해 파업을 하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주기는 커녕 법을 제정해 이들을 합법적으로 말아버리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미군정은 "민주주의적 노조의 발전을 장려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하고, 미군정청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 밑에서 '대한노총'이란 새로운 노동조합이 탄생한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굳이 말 안해도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전평은 박헌영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노리는 타겟 1순위였던 것이다.
1946년 9월의 총파업은 이때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전평의 계획적인 노동 봉기가 아니었다. 맨 처음에는 서울 철도국의 경성 공장에서 시작해 부산과 전남지구로 이어졌고, 전국의 철도노동자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서울의 전화국과 우체국, 전기주식회사, 부산의 전신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한다. 9월 말, 파업 참가 노동자는 남한 전체에서 무려 26만 4천여명에 달했다. 서울에서만 295개 기업에서 3만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한다.
생각해보라. 굳이 상대적인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이정도 파업 인원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창하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벌어질 수도 있는 역사적인 인원과 조건이었던 것이다. 전평이 볼셰비키였고, 박헌영이 레닌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말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더없이 충분했던 찰나의 순간'을 전평은 무능력한 지도부로 인해 날려버린다. 폭발적인 파업혁명 속에서 전평이 갈피를 못잡고 있을때, 대한노총은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개편하고 공장 경영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파업대책위원회와 제휴해 '총파업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빠른 시일 내에 파업을 파괴하겠다고 군정 당국자에게 충실하게 약속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나도 처참하다.... 장택상이 지휘한 2,100명의 경찰들은 9월 30일부터 경성공장의 모든 외곽선을 포위한다. 애국청년단원들과 대한노총원들이 농성장에 돌입해 1,400명을 검거하고 파업단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들은 전국으로 퍼져 미군정의 든든한 지원아래 삽시간에 파업단을 분열시킨다. 전평은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다. 지도자들이 대량검거되면서 사실상 해체되게 되고 대한노총은 이 틈을 타서 곳곳의 공장에 침투해 노동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노동운동' 본연의 역할과는 전혀 동떨어진, 권력에 야합한 더러운 이름 대한노총은 현재 '한국노총'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참으로 한스러운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사다. 그시대의 노동자들이 대단한 걸 원했었나. 하다못해 농지개혁법이라도 해방직후 제대로 제정이 됐었다면 그들이 파업이란 배수진을 쳤었을까. 겉멋들어서 그들이 파업을 한게 아니다. 내 배 부르자고 그들이 파업을 한게 아니다. 인간의 생존이라는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하고자 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파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졸개들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초전박살 내버린다. (더 웃긴건 9월 총파업 강제 해산에 가담했던 김두한 같은 새끼가 많은 이들에게 협객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씨발스럽다)
이후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완전히 죽었다. 1970년 전태일이라는 영웅이 나오기 전까지 노동자는 그저 기계였다. 전태일이 나온 뒤에도, 민주화가 된 후에도, 21세기에도 대다수 노동자는 기계처럼 산다. 우리도 유럽처럼, 미국처럼 존나 멋진 슬로건 내걸고 우아하게 협상하고 싶다. 망루에 올라가서 흔들거리는 목숨을 담보로 걸고 피터지게 절규하는게 아니라, 봉쇄된 건물 안에서 내 와이프, 내 동료가 목 매달고 죽었다는 소식에 피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투쟁이 아니라, 시원하게, 당당하게, 목숨을 내걸고 처자식을 내건 투쟁이 아니라 씨발 좀 멋스럽고 당당한 요구를 하고 싶은거다.
해방 직후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야기가 예상보다 너무 길어졌는데 성한표가 다룬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나에게 너무나도 뜻깊은 저작물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기성세대를 수동적인 기성세대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무력한 노동자들밖에 없었기에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는 전태일 혼자서 이룩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고마운 것은, 우리나라에도 진정 '노동자'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는 것 그 하나가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