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진중권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식인답지 않은 '센스'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너무 배운 냄새를 폴폴 풍긴다. 현학적인 단어, 전문적인 단어들을 선택해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있어보이게 포장을 하고,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은 그저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 자격미달인 사람으로 치부하는 한마디로 허세에 쩔어있는 글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이들이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망각된 채 그들의 글을 읽는 대중들에게 돌아오는 건 '글을 통한 자기과시'라는 부정적인 시각인 것이다. 의사소통의 완벽한 단절.

반면에 진중권의 글은 쉽게 읽힌다. 진중권의 글이 쉬운 이유는 그는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한 두 번씩 오갔던 주제들, 혹은 인터넷에서 사소하게 재잘거리던 주제들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으로 우리에게 사물을 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가끔가다 날 선 글들 때문에 그의 의견이 대립되는 이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이유는 분명 나와는 반대되는 입장의 글이라도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아들기 쉬운 편한 언어로 구사하는 촌철살인의 미학. 진중권의 글은 그래서 참 좋다.

진중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바로 [폭력과 상스러움]이다. 물론 진중권의 소위 말하는 리즈시절이라 하면 독기가 파릇파릇 서려있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나,예술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많이 팔려나간 [미학 오딧세이]를 꼽을 수 있겠지만, 전자의 경우,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서슬퍼런 그의 칼날 때문에 약간은 읽기가 부담스러웠던게 사실이고, 후자의 경우, '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로선 그냥 싱숭생숭했다-_-

[폭력과 상스러움]의 컨셉은 꽤나 독특하다. 그가 독일 유학 시절 읽었던 신문, 잡지, 책들의 한 구절을 따와, 그에 맞는 주제들을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컨셉인가. 일단 '다독'을 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각 글들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글의 모티브가 되는 문장은 그리 쉬운 내용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문장을 토대로 우리에게 알아듣기 쉽게, 술술 읽히는 그 특유의 마법적인 글빨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 책에서 그의 글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느껴지는 번뜩이는 칼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언어유희는 과거보다 빛을 발한다. 그가 보헤미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보헤미안의 십계명이 있다. 대충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같이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라' 뭐 이런 내용이다. 물론 대책 안 서는 망나니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망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획일화, 규격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대한 통찰로써 이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을 유머스럽고 센스있게 꿰뚫어보는 지식인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그가 우리 사회의 '음지'를 살펴보는 시각은 '진중권의 무조건 안티'들마저 사로잡을 정도로 상당히 통찰력 있는데 일례로 "레드컴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잡는 극성스런 반공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타인을 향해 "나는 빨갱이가 아니예요"라고 고백을 시끄럽게 하는 방식, 그것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공격적인 방식의 고백. 그것이 레드컴플렉스다" 무릎을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시원스런 통찰이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말그대로 살아 숨쉰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자기과시'라는 지식인들의 벗기 힘든 무거운 갑옷을 거침없이 훌훌 벗어버렸다. 이 책에서 진중권의 글은 대중들을 향해 읽히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다분히 넘쳐흐르는 생동감 있는 녀석들이다. 근작 [호모코레아니쿠스]에서는 무뎌지진 않았지만, 센스와 위트가 약간은 과거보다는 덜 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을 너무나 가슴 뜨겁게 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시간강사' 진중권의 교수 해임에 열 뻗치고 천불이 나는 이유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위트있는 사람이 '먹고 살' 걱정 때문에 더이상 이런 글을 쓰지 못하고 현실에 부딪쳐 덜컥 '철이 들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가 철이 드는 순간 그의 위트는 위태로워진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이런 철들지 않은 망둥어 같은 사람들까지 돈에 잠식되어 생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대한민국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것, 그것은 바로 진중권 같은 철들지 않은 개구쟁이, 영원한 보헤미안의 부재이다.

-최근 시민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이름 없는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별자리는 그림이면서 그림이 아니다. 그래서 시민들의 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로이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시민들이여, 어둠에 묻혀도 빛나기를 멈추지 말라. 세상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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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09-10-1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에 대한 해석과 시각이 남다르시네요.
내꺼님의 시원시원하게 풀어 쓴 글도 인상적입니다.
잠시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