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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이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이미지 메이킹이든 어쨌든 경제학자로서 선망을 받으며 수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지식인 상'이라는 이미지가 확립되기까지는 그 무엇보다도 수많은 정계의 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은 그의 올곧은 소신과 신념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운찬이 총리로 지목됐다는 소식을 듣고 별반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전 서울대 총장'이라는 상징적 뱃지가 우리나라에 휘두르는 파워가 어디 좀 막강한가? 행여나 정치판에 뛰어든다고 해도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 쪽에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지금의 행적을 보면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약간 실망을 했을 뿐이다.
'착한놈 vs 나쁜놈' 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분류에 근거해 실망을 가졌던 건 아니다.
민주당이 착한놈도 아닐 뿐더러, 국민의 신임을 얻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나쁜 놈도 아니다. 비록 내가 한나라당을 경멸하는건 (민주당도 똑같지만)뚜렷한 정치적 지향방향 없이 오로지 '이념'만으로 막강한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지 그들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유린해서가 아니다.
어쨌건 다시 정운찬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정통 케인스학파 경제학자인 정운찬이 대체 현 정권에서 소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정운찬은 4대강 정비를 위시한 토건주의가 진심으로 한국형 뉴딜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신년강좌에서 MB정부의 무분별한 토건지상주의를 비판했던 그가 현 정부 총리를? 참 기가 차는 일이다.
정운찬의 정치 참여만큼 이 책 [지식인의 죽음]의 커다란 줄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오히려 선진국에서는 그 모순을 점차 극복해 나가고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로 완전히 예편된 한국에서 '지식인'이라는 (이제는 사라진듯한)'담론'의 개념에 가까운 특수층을 조명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인의 죽음, 이는 더이상 상징적인 의미의 은유적 표현을 넘어서 한국 정치와 경제의 '색깔'을 좌우하는 커다란 '사건'이다.
이 책은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시리즈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연재되었을 땐 접해보지 못하고 비록 이렇게 책으로 접하고 있지만, '기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기획은 저널리즘에 입각한 그야말로 보기 드문 '기획기사'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여러 방면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경향신문, 한겨레신문이지만 이런 기사처럼 담론투쟁을 뛰어 넘어 진보와 보수(라고 자청하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사들을 조중동에서 보기에는 하늘에 별따기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참여가 결코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공적 참여, 정치적 참여는 민중들에게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견의 설파나 직접적인 참여로 인해 시민사회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문제는 '참여'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정치에 투신하는 그 순간부터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던 그 시절에 자신의 학자적 소신과 앎 등이 깡그리 무시된다는 사실이다.
군부독재시절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란 명목을 그나마도 희마하게 이어간 것은 대학생들의 깨어있는 정신과 시국선언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지하세계에서의 활동이 큰 몫을 했다. '시대정신'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와 그들의 글은 대학생들에게 용기와 신념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 이들의 말과 글은 실종됐다.
이 책에서는 지식인이 지금처럼 몰락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사회 전반적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때 지식인의 몰락, 즉 죽음은 "근대가 창출한 허위성을 폭로하는 탈근대주의"에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지만, 오늘날만큼 '진실'이 천대받은 시대에는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의 진실"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탈근대주의가 가르쳐준 교훈이, 항상 '지식'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설파하려고 하던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회의감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할 수가 없다. 근대의 허위성이 말 그대로 '환영'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언젠가는 걷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근대의 허위성이 탈근대주의로 인해 무장해제 되었다고 해서 지식인들이 급격히 무기력하게 변했다면 그만큼 허약한 '신념'이 진심으로 시대정신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식인의 몰락을 조금 더 구체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본다면 '외환위기'를 꼽는다.즉, 지식인의 담론이 해제되고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가 외환위기라는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중심적, 가치중심으로 재편됐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버리고, 사회를 물질중심적으로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직접 활동하는 놀라운 실천성(!)마저 보여준다.
사실 지식인들의 권력 욕심은 그리 낯선게 아니다. 조선왕조 때부터 벼슬이란 것은 학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지식인의 죽음'에 더욱 서글퍼지는 것은 반공주의, 권위주의 체제 내에서 그 모든 과거의 '타락상'을 따르지 않고, 몸소 자신의 지식을 현실에 투여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재야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지식인의 죽음만큼 한국 사회의 현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래도, 그럼에도 우리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고병권의 말에 잘 나타난다. 찡하고 감동적이기까지한 고병권의 마지막 말로 글을 끝맺음할까 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데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 편에서는 곧바로 통치가와 자본가일 것이가, 다른 한 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