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p.74
아이가 아프고 젊은 엄마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누항의 일상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는 70살까지 산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나 자신이 풀어져서 세상 속으로 흘러든다. 이 와해를 괴로움이 아니라 평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늙어간다.
새로운 세상을 겨우 찾아낸다. 늙기와 죽기-p.75
이 모성의 국물은 부드럽고 포근해서 한 모금 넘기면 꼬인내장이 펴지고 뭉친 마음이 풀어진다. P.90
한 사발의 국물에 흙과 햇볕의 힘이 녹아 있어서 이 국물을 마시면 창자 속에 봄이 온다. P.91
-동거차도의 냉잇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