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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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p.74
아이가 아프고 젊은 엄마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누항의 일상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는 70살까지 산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나 자신이 풀어져서 세상 속으로 흘러든다. 이 와해를 괴로움이 아니라 평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늙어간다.
새로운 세상을 겨우 찾아낸다. 늙기와 죽기-p.75
이 모성의 국물은 부드럽고 포근해서 한 모금 넘기면 꼬인내장이 펴지고 뭉친 마음이 풀어진다. P.90
한 사발의 국물에 흙과 햇볕의 힘이 녹아 있어서 이 국물을 마시면 창자 속에 봄이 온다. P.91
-동거차도의 냉잇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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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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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바람의 풀이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 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 가을 억새는 날마다 말라가면서 이 꽃씨들을 
바람에 맡긴다. 꽃씨들이 모두 흩어지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 가을은 다 간 것이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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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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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잘 읽힌다. 행간에 남기는 말이 적은 책으로, 그러나
깔끔하고 담백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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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든,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9년 가을 장류진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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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케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건 아니니까."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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