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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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좋게 읽었기에. 그리고 종교도 있고 그 정도의 여유는 있기에. 김새섬 그믐대표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주십사 빈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이렇게 모아두기도 힘들 정도로 독특한 인물들의 향연이다.

801호 슬픔이 필요해서 세브란스 장례식장 근처를 맴돌던 박쥐인간과 만난 슬픈 임산부

802호에 사는 게 힘든 여자아이 쩜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 거지같은 상황에 빠진 남자와 모기

803호 키도 크고 꽤 잘생긴, 그리고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청각장애인 재홍과 138cm 엄지공주(와 802호 쩜)

804호 죽은 동생의 연인이 쓴 작품 「뤼미에르 피플」의 출간허락요청과 이현수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동시에 받는 나연

805호 아내와 어린자식 앞에서 돈다발로 맞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재벌2세들과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느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남자

806호 삶이 어렵지 않은 여자, 소연경과 인터넷 여론 조작기관팀 알렙의 멤버들

807호 결막염으로 인해 버려져 길냥이 세계에 뛰어든 마티

808호 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반인반서(쥐)들의 인간세상 생존기

809호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복잡한 패턴을 한 눈에 인식하는 능력이 미래에는 필요할 것이라 믿으며 훈련하는 상호

810호 차기 밤섬 당주가 될 운명인 현수.

「뤼미에르 피플」은 한마디로 기이하고도 절묘한 인간 군상의 실험실이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열 개의 방 안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이 산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있지만 그 결핍은 이 소설의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처럼 작용한다.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기이한 인물들의 연작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층위를 실험적으로 분할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읽는 내내 이건 현실인가, 환상인가를 자꾸 되묻게 된다. 그러나 장강명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이미 충분히 비현실적인 존재임을 증명한다.

「뤼미에르 피플」 의 매력은 각 호실이 완전히 독립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이어진다는 데 있다. 슬픔, 욕망, 생존, 서사, 비인간성. 이 모든 키워드들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매개로 교차한다.

그렇기에 「뤼미에르 피플」은 실험적이고도 인간적인 세계다.

저자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것을 기묘한 상상의 틀 안에서 다시 비틀어낸다.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과 인간을 향한 연민, 건조한 유머가 교차한다.

장강명은 이 책에서 인간을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비인간이 되고, 또 얼마나 끈질기게 인간으로 남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박쥐인간, 반쥐 인간, 길냥이 마티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과 욕망은 가장 인간적이다. 반대로 인간인 인물들은 종종 가장 괴물 같은 선택을 한다.

결국 이 작품은 ‘무너지는 시대의 인간들’을 위한 일종의 실험 보고서다. 장강명은 사회 구조 속에서 기묘하게 변형된 감정들을 해부하듯 펼쳐놓고, 그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감정의 형태를 찾아낸다.

읽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 한쪽이 낯설게 쿡 찔린다. 우리역시 뤼미에르 피플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소설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거대한 관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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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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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중략)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16-17p

일기 외에 글을 써본 적이 없던 내게 글을 쓰는 것은 혼잣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자 도통 뭘 써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무거나 자유롭게 써봐주세요, 라는 말을 들어도 써달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와 달리 써지지 않았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가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라면 납득이 되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고 또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험은 생경하다. 일기는 혼잣말이기 때문에 자리에 앉자마자 내 얘기만 퍼붓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익숙하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고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 닿았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고요. 17-18p

그러나 이어 저자는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 이야기한다. 결국 내가 일기를 쓰는 것도 어쩌면 나 자신에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면 나 자신에게라도.

글은 연속적이고 뒤엉킨(미분화된) 세계에서 어떤 것은 언급하고 어떤 것은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입니다. 24p

예전에 일기를 썼던 것을 돌이켜보면 일기라기보다 일지에 가까웠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이기에, 최대한 기억이 편집 작업을 많이 진행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각자 편집된 기억으로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는 게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써왔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록해왔던 사람이 아닐까.

주제와 글감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습니다. 글감이 따로 있고 주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동시적입니다. 글감 안에 주제가 말하고, 주제 안에서 글감이 제 빛을 냅니다. 47p

어떤 게 나은 구성일까요? 저는 제가 선택한 구성이 제일 좋더군요. '이게 제일 좋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좋은 겁니다. '아직 덜된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아직 덜된 겁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81p

유일한 문장은 없습니다. 최후의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쓸 뿐. 92p

막연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만 있던 찰나에 이렇게 친절한 글쓰기 책이라니. 저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글 쓰는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한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써도 되고, 그저 써보라고.

이렇게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107p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역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의 언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첫 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나의 첫 눈과 상대방의 첫 눈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언어는 고유하고 유일하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나의 말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서 저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맞지 않는 지가 갈리는 것 같다.

길게 쓴 문장은 선물을 정성껏 감싼 포장 같습니다. 매번 그러면 실속 없는 겉치레가 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주머니에서 덜렁 목걸이만을 꺼내 주지는 않습니다. 포장을 뜯을 때 갖게 되는 기대감과 궁금증을 함께 선물하는 겁니다. 그럴 때 곱게 싼 포장은 선물의 일부입니다.

문장을 길게 쓴다는 것은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덕지덕지 붙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둘러싼 시공간, 전후 상황, 동시적 상황, 여러 사건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를 한 문장에 담는다는 뜻입니다.

(중략) 길게 쓴 문장은 하나의 사건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그것과 연결된 사건을 일부러 함께 보여줌으로써 벌어진 사건을 단순화하지 않고 장면을 쉽게 넘기지 않게 만듭니다. 그 장면에 좀 더 머물라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손목을 잡습니다. 글은 독자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문장을 길게 쓰는 것도 익혀봄직합니다. 129-130p

문장을 길게 쓰는 편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지만 쓰다보면 문장이 길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위안이 되었다. 간결한 문장도, 긴 문장도 나름의 멋과 맛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보다 그냥 먼저 써보는 게 좋다고 저자는 꾸준히 이야기한다.

글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세계를 감각하기 위한 집요함'이라는 것. 136p

글이 할 일과 생각이 할 일을 분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입니다. 글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뿌옇게 뒤엉킨 생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글이 할 일에 여러분의 생각이 간섭하지 않도록 하세요. 생각은 진부합니다. 그러니 글쓰기 실력을 높이려면 무조건 초고를 빨리 써야 합니다. 156-157p

정말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 너무 명쾌하다.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 여기서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바로 '무당집'자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무당집이 기억난다면, 그건 글쓴이에게 중요한 글감이었겠죠. 그런데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 '지날 때마다 기웃거렸다' '굿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고만 하면, 독자는 그 집을 실감 나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중략) 물론 모든 문장에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글감에 대해서는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183-184p

이 부분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간결해야 하는 것은 간결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은 과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았는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콕 짚어야 하는 부분들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편안하게 읽힌다는 것이 불편하고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 쉬운 것만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저자가 몸으로 부딪치며 얻어낸 중요한 부분들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평정심'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는 감정 자체입니다. 감정과 함께 감정과 싸우면서 삽니다. 사실이나 사건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실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싸우는 겁니다. 225p

간지럽히는 손가락이 웃으면 안 됩니다. 간지럽힘 당하는 옆구리가 웃어야 합니다. 227p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깊고도 흥미로운 삶을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해보고픈 욕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309p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저자가 인간적인 매력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쓰는 몸으로 살자는 치열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편안하고 유머러스하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님이 추천사에서 말하듯 방황과 모색의 시간 없이 바로 '쓰는 몸'을 갖추게 해주는 글쓰기 책이다. 정말 저자는 단아하고 명징하고, 진지하고 능청맞으며 부드럽게 성찰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글쓰기도 잘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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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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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터라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번째 미술사」 는 부담없이 잘 읽히는 재밌는 책이었다. 책을 잡고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장 처음에 소개하는 것은 고흐인데, 나처럼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통해 책에 몰입하게 했다. 닥터 후라는 드라마에 고흐가 미래로 와서 자신이 미래에는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고 자신의 작품들 역시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음을 보고 감격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장면은 숏폼과 릴스로 재가공되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졌었다. 저자는 과연 정말 고흐는 살아 생전 작품을 하나 밖에 팔지 못했던 것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고흐가 죽고 동생 테오도 일찍 죽게 되었을 때, 테오의 아내는 어땠을까? 그간 시아주버님께 후원했던 돈도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빛을 볼만하니 죽어버리고, 남편도 죽고 생계는 책임져야 하고. 그녀가 야무지게 브랜딩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생계유지뿐 아니라 지금 이렇게 고흐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거장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술계의 라이벌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로워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실제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서로에게 한계를 뛰어넘는 성장의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존재.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며 대화하며 서로의 존재 덕분에 자신이 갈 수 있었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존재. 나는 이런이야기가 더 좋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고 기억되는 작가들은 브랜드가 잘 구축되어 있는 이들이다. 예술이 뛰어난 경지에 이르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도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파트도 너무 재미있었다.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 뿐 아니라 그는 자기 신화를 조각하는 것에도 천재적이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식의 아티스트 신화 전력은 유효하니까.


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재밌다는 감상이었다. 만들어진 신화와, 시간이 흐르면서 뒤얽힌 오해, 잊혀졌다가 시대적인 흐름에 맞아 다시 기억되고, 이름을 다시 붙여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정설인 첫번째 미술사 보다 이 두번째 미술사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보여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보다 그 이면과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인간 보편성을 더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사라지는가는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쉽고 편안하고 즐겁게 알게 하는 좋은 책, 두 번째 미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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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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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단일한 생명체였다. 하나가 아프면 다른 하나가 고통을 느끼고, 하나가 살면 다른 하나도 생명을 얻었다. 나무들은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가인들의 외침을 통과시키며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잎맥을 타고 흐르는 아이들의 붉은 피가 뿌리 깊이 스며들었고, 숲은 오랫동안 생명의 성전을 이어온 방식 그대로 뿌리와 뿌리를 연결하여 그것에 맞섰다. 그 순간, 신은 콘크리트 성전 안이 아니라 숲 안에 있었다. 십자가와 제단이 아니라 나무뿌리에, 가지 안에, 작은 잎사귀 안에 있었다. 254p

만약 유림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벽돌집에서 숭배하는 절대자나 창조주가 아니라 제 안에 유유히 깃든 신이었다. 260p

잃어버린 시간들이 산기슭 너머에서 이곳으로,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향해 고요히 행진해 오고 있었다. 280p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몽롱하다. 뭔가에 취해 갑자기 미로 한 가운데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파사주는 그런 책이었다. 장르가 판타지인가 싶기도 할 정도로 사건을 명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흘러간다.벽돌집에서 도망친 두 아이 해수와 유림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파악된다.

파사주의 서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아이들, 특히 유림의 감정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기 위한 실험적인 의도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책장을 넘기며 아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사건의 전후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최대한 빠르게 멈추고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바뀌는 이미지와 분위기들을 붙잡게 된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조각난 듯한, 미로를 헤매는 듯한 느낌을 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을 감각 그대로, 감정을 감정 그대로 느끼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 아닐까. 벽돌집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 될 것인데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며 방어할 틈도 없이 불쾌한 감정과 감각이 날 것 그대로 전달된다. 해수의 의문, 유림의 불안, 아버지 선생님이 언급되거나 등장하는 대목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역겨운 어떤 것.

앞서 읽었던 소설 말뚝들과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은 장편 시같다는 것이다. 몽타주처럼 이어진 이미지의 폭풍, 머리로 파악하기 전에 파고드는 감정과 감각. 벽돌집에서 아이들이 겪은 체험이 역순으로 배치되어 어떤 불길하고 불쾌한 예감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이 무례하게 들이닥치는 느낌이 들었다.

파사주는 독자에게 하나의 정답을 주기보다, 아이들이 겪는 혼돈과 두려움을 체험하게 만드는 미로 같은 공간에 초대하는 데 목적이 있는 듯하다. 그 미로가 즐거운 탐험으로 느껴질지, 끝없는 방황으로 느껴질지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제목에서, 그리고 죽기 전엔 죽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유림의 모습에서, 벽돌집 옥상에서 지상으로 내려간 유림의 새로운 여정은 그 모든 무례함과 역겨움, 불안과 슬픔을 깨트리고 나아가는 모습일 것을 믿어의심치 않을 수 있다.

길고 지난한 애도를 마치고 나면 그렇게 새롭게 나아가게 된다고, 죽기전에 죽지 말라고 해수와 유림이 내게 말한다. 나도 그들에게 죽기 전에 죽지 말라고,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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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 - 23개 질문으로 읽는 검찰 상식과 개혁의 길
박용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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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느낌이 드는 표지의 책,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검찰에 대해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아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책을 펼쳐보니 들어가는 말, 어쩌다 검찰 상식이 우리 사회의 필수 교양이 되었나.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비단 독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현대 문명은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리라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런데 정말로 어쩌다 검찰이 이 모양이 되어 시민들 모두가 검찰 상식에 대해 알아야 하게 되었고 우리 검찰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내가 내 자리에서 내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 검찰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랬던 것일까.

검찰 개혁은 '선량한 검사'가 아닌 '최악의 검사'를 전제로 출발해야 합니다. 검찰은 애초 불공정하고 정치적이며 부패하기 쉽고 조직 이기주의에 매몰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최악의 검찰조차 검찰권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 제도를 설계해야 합니다. 27p

딱딱하고 재미 없을 것이라는 인상과 달리 책은 아주 친절하고 술술 잘 읽힌다. 검찰개혁을 ‘최악의 검사’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지적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까마귀 무리에 백로가 들어가서 까마귀가 백로의 영향을 받는 것보다는 백로가 까마귀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선량한 검사, 이상적인 검사, 좋은 사람은 사실 흔하지 않다. 인간은 우리가 꿈꾸는 것처럼 이상적이고 훌륭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까마귀도 백로인 척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비단 검찰이 아니라도 도화지같던 이가 어떤 조직에 들어가 그 분위기에 물드는 일들은 비일비재하여 찾아보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잘못 기소될 경우 피고인이 입는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중대 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일수록 편파적이지 않고 공명정대해야 할 필요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80p

아니면 말고 식의 내부 고발을 당해본 입장으로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기소되는 것만으로도 피고인에게 큰 타격이 갈 수 밖에 없고, 조사를 받고 끝끝내 무죄를 받게 되더라도 피고인의 시간과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보상받을 수 없다. 애초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부터가 매우 폭력적인 일인데, 잘못한 게 없는 상황에서 편파적이고 공명정대하지 않은 일처리를 겪게 되면 인간 문명에 대한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소prosecurtion와 박해persecution는 영어 철자가 비슷합니다. 기소에 약간의 왜곡과 조작만 가하면 누군가를 박해하는 수단으로 변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듯 합니다. 현실과 철자법의 묘한 일치입니다. 87p

검찰권의 분산과 제한 등 구조적 검찰 개혁이 하나의 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리 정밀하게 제도를 다듬어도 빈틈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을 비집고 권력의 독버섯은 자라기 마련입니다. 사후적으로 독버섯을 발견하고 솎아 낼 장치가 필요합니다. 105p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권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기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조금씩의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권력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배우가 부여받은 역할을 자기 자신과 혼동하면 안되는 것처럼. 검사들 역시 자신들이 맡은 직책에 따른 권한을 적절한 견제 아래 행사해야 하는 것이지 권력이라 착각하니 작금의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

권력이 사유화할 때 권력 행사의 원칙은 사라지고 권력 그 자체만 남습니다. 그 권력은 더 이상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야생 동물의 포악함이 됩니다. (중략)'권력은 어디에서 오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든 권력자와 권력 기관에 뼛속 깊이 각인시켜야 합니다. 군, 검찰 등 권력 기관의 사유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도록 물샐틈 없는 민주적 통제장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115-116p

서용주 맥 정치사회연구소장은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서 헌법에 권력이라는 단어는 국민한테만 쓰인다고 말했다. 권력과 권한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입법과 사법, 행정은 일정기간 위임된 권한이라는 것부터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권한자들이 스스로를 권력자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이 권력이 아니라 위임된 권한이라는 것부터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검찰총장의 퇴임 뒤 공직 취임과 정당 가입을 제한하는 검찰청법 조항은 결국 위헌 결정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검사가 이에 대한 확고한 소신 아래 구체적 사건의 처리에 있어 공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확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제도적 해법을 찾는 대신 개별 검사들의 소신에 맡겨두자는 것인데, 독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118p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는 어떨까?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이 되어버린 검찰의 모습. 임기를 마치지 않고 사퇴하여 정치에 투신하는데도 내부적으로 아무런 비판도 반성도 없이 아첨하기 바쁘다. 권한이 아닌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사실상 정말 권력을 발휘하고 있다보니 이런 모습들은 더 공고해지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검찰 전체를 하나의 검사동일체로 묶어버렸습니다. 검찰총장 한 명이 전국의 모든 검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모든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중략) 민주 국가에서 정부 기관은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구성원 각자가 제자리에서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법률에 맞게 수행해야 합니다. 각자의 자율성과 전체적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는 게 성숙한 민주 국가의 공적 조직 원리입니다. 150-151p

대학과 중용에서는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더 신중하고 조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소인에 불과하며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기에 삶을 살아가며 가장 어려운 일은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나 스스로를 경계하며 속이지 않는 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스스로 경계할 수 있는 사람들도 홀로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저자는 거듭 제도적으로 이런 것들을 보완할 수 있는 검찰개혁이 되어야 함을 끈기있게 다른 나라의 검찰제도들을 소개하며 설득하고 있다.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검찰이 내부 비위에 대한 처리 권한까지 독점한다면 특권 계급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 "내 손이 깨끗해야 남의 죄를 단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손'으로 법 집행을 하는 공직자가 있는데도 쫓아낼 수단조차 없다면, 국민이 그런 공직자한테 계속 수사·기소를 당해야 한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치주의도 더럽혀집니다. 244p

결국 이 책은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일반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도 제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길이라는 점을 다른 나라의 제도들을 소개하며 환기시킨다. 검찰개혁 뿐 아니라 우리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권한과 권력을 혼동하지 않고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검찰 상식이 우리사회의 필수교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서부터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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