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앞서 한겨레 출판사에서 나왔던 『두 번째 미술사』를 너무 재밌게 읽었던 터라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기대하며 펼쳤다. 그리고 역시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게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다짐했다. 어떻게든 조각난 마음을 맞추기로. 억지로 흐르던 시간에 갇혀 있던 때였다. 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힘든 일들이 "이제 네 순서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기다린 듯 겹쳐오는 그 파도를 온몸으로 맞던 때였다. 좋아하는 그림과 미술사에 대한 애정은 성난 파도에 휩쓸렸다. 떠올랐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라던 친한 후배의 한 마디가. 9p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에 닿았던 구절. 너무나 좋은 직장임이 분명한 우리 회사. 그런데도 이 회사는 내겐 악질이다. 나를 전면에 내세워 홍보는 실컷 하고 내팽겨쳤다. 14년이 지나가는 동안 나를 보호하지 않았고 나를 공격하고 고립시키고 보상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의 정점이었던 올해. 내가 피해자 모드가 될까 저어하고 있는동안 나는 직장내괴롭힘용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에 눈을 돌리니 괴로움이 옅어져 갔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10p
저자처럼 나도 올해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며 인형뽑기를 하며 괴로움을 희석시켰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숨어버린 빛줄기를 찾고자 썼다. 2023년 여름의 초입, 가장 괴로운 시절이었다. 칼럼 첫 회가 게재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외침이었다. 10p
이렇게 쓰여진 책이구나, 하며 이미 내 마음으로 이 책이 들어와버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갤러리를 누비는 관람객이 되어보았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던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허물어질 듯한 판잣집을 보았고 그 모습이 왠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24p
작가는 작업을 통해 어느 시절 초라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위로하고 치유했다고 한다. 25p
정영주의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 2020년 작의 이야기다. 한 때 나는 구룡마을이라는 곳에 살았었다. 나는 그 곳이 허름하다던가 초라하던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 서울 하늘 아래 우리가 모여 몸 누이고 밥 숟가락 뜰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방에서-자매와 늘 같은 방을 썼다- 창문 밖을 바라보면 보이던 풍경과 닮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귀퉁이에 웅크린 나의 모습같은가? 옹기종기 모여 엎드린 사람들같다. 거기 나는 없다. 소외된 나.
이 책은 작품을 소개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보면 한 챕터가 끝난다. 알차다. 저자의 필력이 장난아니라 글맛이 너무 좋다. 저자의 글을 읽는 재미, 낯선 작품들을 소개받는 재미, 그 작품의 작가와의 인터뷰를 읽는 재미에 쉼 없이 완독할 수 있었다.
도시는 명멸한다. 유난히 내 그림자가 짙어 보이는 날도 있다. 다만 잊지 않기를. 뾰족한 빌딩 숲 속 곡선을 그리는 건 당신임을. 끝내 살아가리라. 달콤하고 살벌한 이 도시에서.54p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쫀득한 키보드를 두드릴 때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다.
감정의 진폭은 주로 일상에서 크게 움직인다. 자기혐오, 인간관계에서 오는 중압감, 미래에 대한 불안, 세계에 대한 우려 등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 '작업'은 이 소용돌이를 잠재우기 위한 행위이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내 세계관 속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 일은, 일상에 쌓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그것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다. 56p 민준홍.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의 작업 시간. 59p 민준홍
크게 공감했다. 나에게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일상에 쌓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그것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은 무엇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연기를 하는 것 무엇이든 좋으니 나도 그런 작업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 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태어난다. 성별은 주어질 뿐이다. 각자가 던져진 생 안에서 분투한다. 그 길 위에서 여자 또는 남자라는 이유로 아플 일들이 줄어들었으면. 나혜석이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떨지 묻고 싶다. 이재헌이 바라는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에 대해서도. 다시 계절의 끝자락이다. 당신의 자화상이 자주 웃음 짓기를. 116p
잠들지 못하는 밤과 새벽이 얼마나 길고 힘겨운지 잘 알고 있다. 상실과 마주하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비로소 깨닫곤 한다. 문득 달라진다. 캔버스 가득한 풀숲이 쌓인 잿더미 같다. 붉고 하얀 풀꽃들이 무채색으로 보인다. 타오르다 남겨진 것들이 서글프다. 128p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속이 상했다. 작은 공간도 남겨두지 않은 작품 속 풍경이. 해사한 꽃송이 하나 발견할 수 없는 적막한 숲이. 아픔을 직면하라는, 너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외침 같았기에.
"현실에 절망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향해간다." 129p
고통은 흐르지 않는다. 겪어낼 뿐이다. 가혹하다. 만약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날을 지나고 있다면. 시간이라는 마법에 기대어보자고 얘기하고 싶다. 계절은 흘러간다. 340p
이채원의 고요의 바다 속에 갇힌 것 같은 요즘, 이 책을 읽고나니 그림들을 보러 가고 싶다. 갤러리 한 구석에서 남몰래 울다 오고 싶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우진영의 마음과 미술잇기, 독자의 마음과 미술잇기, 작가들의 마음과 미술잇기, 작가들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 잇기, 독자의 마음과 저자 우진영의 마음잇기 같다.
외롭고 서글퍼서 무언가와 이어지고 싶은 날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