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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바야흐로 자기 검열의 시대이다. 조금의 흠결도 누군가에겐 큰 균열이 되어 평생 꼬리표가 된다. 우리는 도덕 아닌 도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누군가에 대한 평가에 엄격히 군다. 서로서로 평가하는 게 너무도 익숙하고, 때론 무례하다는 걸 잊어버린 시대. 보이는 것만 보고 단편적으로 판단을 일삼는 이 시대, 당연하게 굳어져 이제는 일상이 된 그런 시대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한 여자가 있다.
여자의 이름은 영아. 27세 유치원 교사로 항상 잘 웃고, 남을 배려하고, 욕지거리가 나오는 상황도 잘 참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이 정한 도덕의 정의를 친구도 같이 실천해 줘야 하는 성미를 가진 친구의 비위도 잘 맞춰주고, 5년이나 사귀었지만 별 감흥이 안 드는 남자 친구도 그저 자신을 좋아해 주고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 계속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떻게 인내하고만 살 수 있을까? 인내가 강한 영아에게도 어느 순간 균열이 찾아온다. 예전에 인내심 강한 자기 모습을 되찾고 싶었던 영아는 한 의학연구센터에서 정서를 조절하는 간단한 뇌 시술을 받게 된다. 그 이후 영아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이야기가 <오렌지와 빵칼>이다.
뇌 시술을 받은 영아는 소위 ‘도덕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고 불쾌하기도 한 모습을 보인다. 답답한 상황에서 늘 꾹 참기만을 택했던 영아는 이제 참지 않는다. 평소 짜증 나게 굴던 사람과 상황에 반항하기도 하고, 더욱이 남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행복(샤덴 프로이데)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으로 처참히 망해버린 누군가의 인생, 토막난 인체 등 이름 모를 누군가의 괴로움으로 점철된 삶과 상황을 관음하며 영아는 질질 침까지 흘려가며 쾌락에 겨운 웃음을 뿜는다.
사실 이런 모습은 그리 놀라운 것 없다. 우리 모두 도덕이라는 통제의 가면 아래,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쾌락이라는 자유를 하나쯤은 품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솔직해져 보자. 우리 모두 각자의 도덕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 각자의 샤덴 프로이데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당장에 샤덴 프로이데는 익명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만 봐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렌지와 빵칼>은 늘 도덕이라는 여러 잣대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이면적인 모습에 주목한다. 이 작품을 읽을 때 드는 충동적이고, 폭력적이고, 그래서 상당히 불편하기까지 한 복잡한 감정은 작가가 그런 이면적인 모습을 영아라는 인물을 통해 불쾌하리만치 잘 조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불쾌하다는 느낌은 한편으로 우리가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사실도 함께 조명하는 듯하다. 또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동시에 반전 있는 스토리텔링도 좋았다.
보통 소설책은 마냥 시간 때우기처럼 느껴져서 직접 돈 주고 사지는 않는데, 이 책은 뭔가 강렬히 끌려서 사서 보게 됐다. 결론은 왜 금방 3쇄가 됐는지 알 것 같았던 소설. 상큼하면서도 서늘하고, 묵직하니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