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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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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남자들은 참 편하게 사는 것 같아요

 

발끈했다.

 

남자들도 불편해. 늦은 밤, 여자 뒤에 걸으면 불안해하는 게 느껴진다고. 그래서 일부러라도 앞질러 가. 그것뿐인 줄 알아? 에스컬레이터에서는 핸드폰도 높이 들고 써. 뒤에서 몰래 사진 찍는다는 오해받을까 봐. 심지어 위가 아니라 살짝 옆을 보고 서있어. 쳐다본다고 할까 봐.”

 

남자들도 불편하면 목소리를 내야죠. 근데 왜 침묵하는 거예요?”

 

찜찜했다. 술에 취해 집에 오면서도 그 찜찜함에 대해 생각했다. 내 말은 대답이 아니라 변명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서도 카메라가 없는지 살펴보고, 엘리베이터에 남자가 타지 않는지 두려워해야 하는 세상이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나보다 어린 그 청춘의 죽음이 없었다면 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2.

싸울 이유가 전혀 없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둘러싼 언어의 문제는 남녀 대립으로 번졌다. 논의되어야 할 쟁점은 사라지고 일베와 메갈로 대표되는 남녀의 대립만이 남았다.

 

이 문제가 언어의 문제인 이유는 '여성 혐오'를 이해한 사람과 '여성 혐오'를 이해하지 못 한 사람들이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 한 채(혹은 알아 달라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에서 오는 사회적 문제들)을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misogyny’'여성 혐오'로 번역하면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여성, 혐오

 

두 단어만으로 그 뜻을 유추해야 한다. 단언컨대,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여성' + '혐오'의 조합을 보고 여성 비하와 멸시를 포함하는 ‘misogyny’의 원래 뜻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성 혐오'라는 말에

 

"나는 여자 좋아하는데? 혐오하지 않는데?"

 

라는 반문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싸우기 시작했다.

 

여성혐오증[misogyny]

남성 혹은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증오와 공포를 의미한다. 남녀 모두 여성이란 원래 지적으로 열등하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며, 어린애 같거나 관능적이라는 신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비하하거나 멸시하면서 쉽게 성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성혐오증 [Misogyny],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여성혐오'여성''혐오'하는 것_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쳐

 

3.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다. ‘여성 혐오를 정확히 이해하던가, ‘여성 혐오를 조금 더 적확한 단어로 대체하던가. 지금까지는 여성 혐오를 이해시키려는 노력들이 지속되었지만 진전은 없어 보인다.

 

여자를 싫어하는 게 여성 혐오인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많다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럼 더 알기 쉬운 번역어를 사용해보자. 바로 여성 멸시.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5, p.12

 

그래서 난 여성 멸시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여성 혐오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한다. 지금의 남녀 대립은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강요함으로써 강화되고 고착되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쳐

 

4.

여성 혐오 반대!”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진전이 있을 수 없다.

 

여성 혐오 반대의 진짜 의미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지만

여성 혐오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으로 생각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사과 먹을래?" 하고 물었는데

"사과를 왜 해? 난 잘못 한 거 없어."라고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껍데기가 논점을 가려버린 셈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5.

난 남자들이 정말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해서 반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부분에선 여성이, 어느 부분에선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

 

분명한 건 육체적인 힘은 분명 남자가 앞선다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여성이 남성에 비해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폭력에는 성폭력도 포함된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은 여성이다_통계청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지나가는 여성을 각목으로 가격한 남성

화장실에 숨어있다 여성을 살해한 남성

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산 중인 여성을 살해한 남성

 

당장 떠오르는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만 이 정도다. 살해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만을 골라 저지른 범죄라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여성은 분명 폭력에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어렵다. ‘여성은 약자다’, ‘여성은 저항하지 못 한다’, ‘여성은 쉽게 제압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사회다. 근데 지금의 언론은 문제의 원인이 조현병이라고 쉴 새 없이 떠든다.

 

그래, 살해의 원인이 정신질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병의 증상 또한 문화를 반영한다.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가 여성만을 골라서 살해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건 이곳이 여성이 멸시받는 사회라는 반증이다. 정신질환이 살해의 원인이니 여성 멸시와 관계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실패다.


올스타 페미니스트 팀은 만연한 사회문제라고 표기된 골대에 공을 차 넣으려고 연거푸 시도했고, 주류 언론과 주류 남성들이 포진한 상대 팀은 고립된 사건이라는 예의 많이 본 골네트에 공을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주류팀의 골키퍼는 공을 자기 골네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리기 위해서 정신질환이란 말을 외치고 또 외쳤다.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 p.178

 

6.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쓴 문장들이 나를 짓눌렀다. 그들의 아픔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라는 걸 잘 안다. 인구의 반을 적으로 돌리거나, 모든 인구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써야 하는 건 남자라고 침묵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지

밤늦게 돌아다니니깐 그런 일이 생기지

여자도 은근 바랬던 거 아니야?’

여자가 성격이 저래서 어떻게 하려고 해

자기가 파인 옷 입고 다니면서 쳐다보지 말라는 건 무슨 논리야?’

 

이젠 말할 수 있다. 이 사회엔 여성 멸시가 전반에 깔려있다. 의식하지 못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호명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이 사회가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남자를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남자도 여자도 사회의 구성원이다. 남자를 비난하지 말고 사회를 겨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언어에 있다. 페미니즘은 무엇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 헌정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


리베카 솔닛, 위의 책, P.112

 

그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현상의 표출을 인식하고 지탄하게끔 도울 것이다. 상황을 바꾸는 것을 도울 것이다. 언어는 중요하다.


리베카 솔닛, 위의 책, p.194

 

 

난 남자다_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쳐

 

 

* 참고자료

 

1. 통계청,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3/index.board?bmode=read&aSeq=306963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정책뉴스>새소식>통계청

kostat.go.kr

2. SBS,그것이 알고 싶다, 2016.06.04.() 검거된 미제사건 -강남역 살인사건의 전말

3.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5

4.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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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6.1.2 - no.004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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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구입해서 챙겨보았지만 이번 인터뷰는 아니었습니다. 도끼가 언제쯤 문단의 아집을, 순수문학의 고집을 깰 수 있을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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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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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핫한 작가, 장강명의 가장 장강명스럽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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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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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편 소설이지만 장편 소설보다 더 큰 울림이 있다. 장강명스럽지 않으면서, 장강명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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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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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강명의 책에는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는 사람들이 나올까. 표백에서도 나오고 뤼미에르 피플에서도 나오고, 에바로드에도 나오고. 궁금하다. 무슨 이유일까. 이 책이 아마 그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과감히 질러본다. 무엇보다 장강명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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