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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죄책감 수치심 - 다루기 힘든 감정들과 친구 되기
리브 라르손 지음, 이경아 옮김 / 한국NVC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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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죄책감, 수치심 뒤에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 존재

감정 이면의 욕구에 연결해 더 나은 방안을 찾을 것


부정적 감정 뒤에는 좌절된 욕구가 있다

분노, 죄책감, 수치심은 다루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감정 자체가 아닌 감정을 불러일으킨 욕구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화가 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순간의 감정은 '분노'이지만 그 뒤에는 '안전', '규칙', '예의' 등의 욕구가 있는 셈이다. 내 앞을 지나간 오토바이가 안전 등에 대한 나의 욕구를 좌절시켰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순간에 분노 자체를 다루는 것보다는 '나는 안전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구나', '오토바이가 규칙을 무시해서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죄책감이나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인정하되, 지나치게 자책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대신 나의 가치관을 파악해 나와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거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친구의 믿음을 저버려 친구에게 욕을 먹고 연락이 끊긴 상황이라고 해보자. 이 상황에서 자책은 쓸모가 없다. 나의 잘못과 문제를 직시하되 자책할 에너지를 더 나은 방법을 찾아 실행하는 것에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나의 욕구는 '연결', '안전' 등일 수 있다. 물론 나의 욕구만이 아닌 상대의 욕구도 고려해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원칙이다.


수치심에 저항하지 마라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 중 다른 하나는 '분노, 죄책감, 수치심'을 기반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지우려고 하는 행동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동기로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내린 결정은 후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죄책감과 수치심 뒤에 있는 나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보일 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소비를 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소비를 하는 순간에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수치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소비한 만큼 자산은 줄어들고 더욱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다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학습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모습을 일부러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마음에 저항하는 방식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아차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 안의 욕구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저항'이 아니라 '수용'을 통해 가능하다.

 

다만 책의 예시는 번역의 문제인지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다소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나한테 변덕스럽다고 말할 때 당신은 실망스러운 것 같아요. 그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가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는 걸 제가 이해했으면 하나요?(p.104)"와 같은 대화가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 있을지 의문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마셜 B.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를 추천한다. 책의 많은 부분이 『비폭력대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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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죄책감 수치심 - 다루기 힘든 감정들과 친구 되기
리브 라르손 지음, 이경아 옮김 / 한국NVC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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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단독으로 읽기에도 무리는 없으나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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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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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깃밥에 갇힌 사회

이철승, 『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저자는 강연 중 "선생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p.369)라는 질문을 던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좌절감에 깊이 공감했다. 나 또한 다른 강연에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제도(시험)를 언제까지 거부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험을 통한 채용과 능력주의가 강화하는 상황에서 나 또한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은가"하는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시험의 결과에 따른 차별(차이 혹은 차등)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도 안다.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선발되는 과정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은 낙오자의 변명으로 들릴 것이라는 걸 말이다. 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노동이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가 정규직이 되어 안정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행복으로 곧장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기 보단, 공동체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행복의 불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각자의 행복이 사회 전체의 부와 행복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둔다 하더라도 불행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삶을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부지런히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벼농사 체제의 협업 시스템에서 찾는다. 벼농사는 밀농사와 달리 공동체가 함께 작업하고, 수확은 개별적으로 가져가는 구조다. 다수의 표준화된 숙련 노동을 통해 효율적인 성과를 얻어낸다. 나이(경험)가 많은 사람이 주도해 마을의 벼농사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자발적으로 감시한다. 어느 집의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누가 아픈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현재의 노동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공제에 따라 더 오래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준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고, 그가 일을 잘하는지 계속해서 신경 쓴다. 


  그런 방식이 지금까지는 폭발적인 속도와 효율성으로 선두 그룹을  추적하며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많은 임금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연공제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은 이러한 룰을 흔들기 시작했다. 연공에 의한 임금보다 능력에 의한 임금을 보장해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중첩되는 문제는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 또한 능력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고생해서 정규직이 된 사람이 더 많은 임금과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같은 노동을 한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상관없이 같은 임금을 받는 게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연공제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건, 비정규직을 배제한 채 정규직의 노동조건만을 향상하려 했던 (일부) 노동조합에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업무에 있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차이가 없다면 그 시험은 업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방식인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노동이 존재한다. 그들이 그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시간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편적인 복지의 확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자리로의 진입이 어려울수록 해고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이 유연성을 주장하려면 실업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을 보자. 각자 알아서 잘 살면 되는 세상이라면 우리나라 자영업자는 다 잘 살아야 한다. 폐업하는 자영업자는 노력이 부족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더 많이 일하고 더 힘들게 일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왜 본인의 노력 부족을 탓하게 되는 걸까. 처음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비정규직으로 계속해서 노동하는 사람의 노력과, 정규직이 되기 위해 시험을 본 사람의 노력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가? 누가 더 노력했고, 누구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음에도 왜 우리는 정규직이 되지 못한 스스로를 비판하고, 노력이 부족했다며 탓하게 되는 걸까. 그건 우리 사회가 부의 축적과 가족주의를 통해 재난을 대비했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소득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더 높은 세금을 내려는 유인이 사라진다. 복지는 점점 멀어진다. 국가는 세금을 더 걷어 재분배를 실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당신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해봐야 행복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스스로 내편이 되어 열심히 노력했다고 다독여봐야 주변의 시선은 정규직이 되지 못한 사람을 탓하고, 부를 축적하지 못해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비교하고 사랑하며 동시에 질시하고 질투하는 이 사회는 우울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공동의 부와 행복의 증가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데 힘을 쏟는다. 나의 가치를 올리려 힘쓴다. 능력주의로의 환원이다. 능력에 따라 보상하라. 다만 그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식이 합의되지 못했으며, 노동으로 인한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도 자산이 스스로 부를 축적하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성별, 세대, 직무, 직급, 노동의 형태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정의 화신이 되어 각자에게 불공정한 사회에 각자의 방식으로 분노한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다 네가 사회생활 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 이야기들은 결국 체제를 인정하고 수호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일이 있더라도 이 조직에 적응하고 버텨야 너도 보상을 받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사회가 절대 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입사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업무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이 차이에 따라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게 가능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또한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적극적인 복지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현실화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 체제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먹지만 공깃밥 속엔 우울이 가득하다.



* 본 리뷰는 문학과지성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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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말은 웃어넘기지 않습니다 - 나를 지키고 상대를 움직이는 말의 기술
도쓰게키 도호쿠 지음, 노경아 옮김 / 일센치페이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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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나온 다른 사람의 말

도쓰게키 도호쿠 지음, 노경아 옮김, 『불편한 말은 웃어넘기지 않습니다』, 일센치페이퍼, 2020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툭 던져진다. 반응할 수 있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잘못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서, 혹은 되려 비난받을 게 뻔해 넘어가는 편을 택한다. 모든 말들에 반박한다는 게 불가능이라는 걸 알지만, 침묵을 지킨 나도 그 말에 동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다. '다음번엔 짚고 넘어가야지!' 다짐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 '나만의 옳고 그름을 끊임없이 생각(p.111)'하는 일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이 책의 1, 2부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 어떤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상대의 처우를 공격하는 발언은 '인신공격의 오류', 현재 상황과 관련 없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피장파장의 오류'라는 식이다. 이는 나의 마음을 헛소리로부터 지키는 데에 분명 효과가 있다. 헛소리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나면 그 주장을 나와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차별과 혐오의 말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존재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주장이 사회와 멀리 떨어져 있고, 소수의 집단에서 공유되는 데 그칠 거라는 생각 또한 틀렸음을 절실하게 경험했다.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앞장서 억지 주장을 하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결집했을 때 현실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한 말이 가진 오류를 지적하고 반박하려 한다. 타인을 향하는 말의 화살이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논리적인 접근이 그 사람의 말을 멈추게 하였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수용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논리적인 지적을 해봐야 그는 더 굳게 마음을 닫고, 내적 논리를 강화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객관적 접근은 감정을 배제한 후 이성과 논리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감정마저도 논리와 이성적 영역에 포함해 분석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책에서 예를 든 강남역의 '남자 A'를 생각해보자. 남자 A는 본인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자신은 신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자유라고 주장하며 칼을 꺼냈을 때 그를 논리만으로 설득시킬 수 있는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가 본인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심리적 요인과 그의 내적 논리를 파악해야 한다.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야만 남자 A도 자신의 생각에 비현실적인 지점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는 공동체의 안전과 성숙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나만의 옳고 그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개인의 합이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 또한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기준에서 다시 생각하라는 말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공동체나 사회가 추구하는 최소한의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력이 있음에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세금을 덜 내고 있으므로,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가치 있는 공론장의 형성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시민의 선거권은 보장된다'는 등의 최소한의 규칙은 정해져야 한다. 그것 없이 법이나 윤리, 규칙들을 각자의 기준으로 재해석하는 게 무제한으로 허용된다면 사회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이를 전제로 했겠지만(그리고 이를 지적하는 것도 이 책에서 말한 논리적 오류 중 하나일 테지만) 현실은 영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스스로의 의견을 검열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지려 하는 동시에, 시대와 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내 주장이 맞다고 인정해주는 집단과 사회의 지지 속에서 내 입으로 남의 말을 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나 또한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해 여전히 내 언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 하나마나한 말로 대화에 참여하곤 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이 굳은살처럼 박혀있어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피곤함과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정말 내 생각이 맞는지, 그리고 그게 더 나은 우리 사회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주는 안락함에 빠져 '혐오할 자유가 있다'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가 되거나, '차별하려는 건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내면화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 본 글은 일센치페이퍼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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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의 채식주의자 -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전범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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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까지 연대할 수 있을까. 답을 찾기 위해 나의 무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시작은 비우는 것부터였다. 무지가 오롯이 무(無)의 공간이라면 부족한 것을 찾아 채워 넣기만 하면 됐겠지만 내 머리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자리를 다른 것들에게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주목받지 못했고, 소외되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들이 만들어간 역사와 흔적들을 온갖 이유로 거부했다. 내가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들이 차별이었고, 그 무관심 또한 기득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운다고 채워봤지만 연대의 이유를 내 것으로 소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차별과 혐오는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래서 당위에 기댔다. 노동, 페미니즘, 채식, 통일 등에 대한 연대의 기반은 ‘그래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렇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한 발 물러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채식을 시도했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번거로움과, 메뉴 선정과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불편함, 비용의 증가 등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만에 포기했다. 연대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지점에선 타협하기를 반복했다.


  무력하고 우울했다. 나 하나도 못 바꾸면서 타인을 설득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말을 하는 나의 모순을 견딜 수 없었다. 권리를 주장하되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말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내 행동에 대한 근거가 내 안에는 없었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다짐은 내 삶을 점점 얽매었다. 당위에 구속된 나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문학은 쓸모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김현의 말을 되새겼던 시간과,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나의 생각은 이상에 불과했구나. 치기 어린 생각은 그만둬야겠다. 나도 사회가 말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울면서 다짐했다.


  그때 전범선은 “이상과 현실, 신념과 행동의 부조화를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기준은 고수하되, 때에 따라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p.157)라는 말을 건넸다. 완벽해야 하고,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채찍질하다 전부 놓아버리는 것보단,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해나가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동물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나의 모순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범선의 말처럼 “동물해방운동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 비건의 도덕적 숭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신념과 행동 간의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동물들(p.158)"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지나친 소비와 생산으로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에게만 한정해도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전염병과 이상기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위기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집이 없는 사람, 일당으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다. ‘집에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다. 우리는 접촉을 줄이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일 수밖에는 없다. 자생력이 소멸된 사회는 동력이 소멸되어 멈추는 순간부터 곪은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코로나는 새로운 시대를 만든 게 아니라, 애써 감춰왔던 진실이 드러나는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덜 쓰고 덜 버는 거라 생각한다. 물론 소비사회에서 소비하지 않으며 삶을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벌고 더 쓰는 것만큼이나, 덜 벌고 덜 쓰는 것도 어렵다. 끊임없이 타자와 나를 비교하고,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에서 소비 자체가 정체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도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지 않으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소진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라는 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또한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지나쳐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더 많은 존재의 자유를 위해 연대할 때에 확장이 가능하다.


  동물해방운동과 채식은 동물을 포함한 수많은 존재와 자유를 위해 연대하겠다는 삶의 태도다.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연대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나는 비겁한 인간이라 지금 당장 나의 식단을 전부 채식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나의 삶으로 가져올 것이다. 투명 플라스틱은 비닐을 제거해 분리 배출하고,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한민족이이 아닌, 평화를 위한 통일을 지지할 것이다. 태도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지치지 않도록 조금씩이나마 실천할 것이다. 나의 연대가 우리의 자유와 삶의 방식을 점점 더 확장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자유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범선이 던진 질문 하나를 남긴다.     


  “모두가 해방되지 못한 세상에서 나만 자유롭다면, 그 자유란 정당한가?” (p.73)



* 본 리뷰는 한겨레출판을 통해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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