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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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2번째책

그는 집을 잃고 가족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아직 삶을 버티게 하는 두 가지 무기가 남아 있다. 두 마리 개와 한 권의 책. 개는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일 것이고, 책은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그의 정신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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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풍부함, 그것이 우리가 구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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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군청색 양복을 입고 책을 읽는 노인은 어떤 싸움에서 돌아와 여기 앉아 있는 것일까. 왠지 그의 책 읽기는 매일 그 장소에서 이어져온 것 같다. 아일랜드의 외딴 바닷가에서도 그는 책을 통해 런던에도 가고 파리에도 가고 아마존에도 다녀왔을 것이다. 어떤 문장은 소리내 읽었을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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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볼 때마다 그것을 사던 장소와 시간뿐 아니라 그 시계가 거쳐왔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보곤 한다. 신기하게도 시계들은 똑같이 맞추어 놓아도 얼마 지나서 보면 꼭 몇 분씩 차이가 난다. 어떤 시계는 조금 늦다. 이렇게 집 안의 시계들이 조금씩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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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년을 마치고 배편으로 이삿짐을 부치면서 이 고장난 시계를 버리지 않은 것은 몇 달 남짓 정이 들어서였다. 식구들은 짐을 하나라도 줄여야 할 판에 고물을 왜 가지고 가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이 시계는 고장난 게 아니라 독특한 존재 방식을 지닌 사물‘이라고 우겨댔다. 현재의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은 잃어버렸어도 어떤 물건이 백 년을 넘겼다면 거기엔 영혼 같은 게 깃들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신비를 해독해나가야 할 의무가 시인인 나에게는 있다고. 언젠가 이 알 수 없는 시계에 대해 한 편의 시를 쓰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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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렇게 조금씩 틀리거나 어딘가 이상한 시계들이 종종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시계는 정확하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시계로 대변되는 근대적 시간관에 대해 공연히 딴지를 걸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인간이 시간을 일정한 길이로 쪼개고 시, 분, 초의 단위를 만들어낸 것은 대단한 발견 중 하나다. 게다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순간순간 일깨워준다. 표준적인 시계들 한 켠에는 그 규범을 이탈하기 좋아하는 시계들도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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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시간의 상징형식인 동시에 실제로 우리의 시간을 매순간 지배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계는 종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일과를 지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게 아니라 시계가 이끄는 대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다가 하루가 지나가고 만다. 몇시에 약속, 몇시에 회의, 몇시에 강의. 그 숫자들 속에 갇혀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그렇게 일생이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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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빼앗아가는 시간과, 뒤엉킨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며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원망하기도 하고, 고통을 씻겨주고 가라앉혀주는 시간에게 감사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보다 시간의 너그러움에 좀더 기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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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헤어지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때쯤 되어서는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잠글 수 없다는 것을, 잠그려고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또는 열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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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이 찍은 내 뒷모습 사진을 받아들 때가 있다. 내 뒷모습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먼 타인처럼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또 하나의 내 얼굴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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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뒷모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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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책으로 선택.
마지막이라고 조바심이 들어서 급하게 읽은 게 아니라, 책을 펼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다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시인들의 표현은 정말이지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오늘 출근해서 찬찬히 시집 서가를 살펴서 한 권 데리고 와야겠다

#다음엔뭐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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