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 좋은 방
용윤선 지음 / 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로 가서 거꾸로 읽는다. 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붙잡고 놓지 않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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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된 시작은 나에게 있다. 그 시작에 대한 기억도 뚜렷하지 않지만 영혼의 물리적, 화확적 변화가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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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만큼 정확한 기억은 없다. 냄새는 기억으로 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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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란 멈출 줄 몰랐다. 모두 늙지만 기억은 어떤 시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꿈속 당신이 늘 젊다는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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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커피는 원래 그 향을 갖고 있어. 그냥 갖고 있는 향을 사람이 추출하는 것뿐이야. 없는 향을 만들어 추출하는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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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당신에게 나도 상처를 주었구나 생각했더랬어요.˝
˝사랑이 운명이라면 상처는 숙명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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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귀찮아하면 안 된다. 결국 귀찮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므로. 사람이 사람을 고마워하면 안 된다. 결국 고마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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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 사이로 나무의 몸통이 보이고, 나뭇잎 결이 눈에 들어오고, 하늘은 푸르지 않고 회색빛이며 높다는 것을 알았다. 비바람에게도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잃은 것은 한 사람인데 얻은 게 많아서 고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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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생략하고 살 때가 간간이 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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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을 만나고 이십 년을 만나고 아니 평생을 만나도 사람은 모른다. 그렇게 된 과정에는 말없이 떠난 사람이 있었고, 돌아왔지만 다른 사람일 때도 있었고,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다. 결국 사람은 변하기 때문이다. 나를 믿지 못해 사람을 믿지 않는 모순의 자기애이기도 할 테지만 모른 채 사는 것이 상처를 덜 주고받는 생존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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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세요... 라는 말. 명령 같기도 하고 당부 같기도 하고, 지구 건너편 얼룩 기린에게 보내는 아득한 안부 같은. 또 봐요... 란 말 같기도 하고 보고 싶지만 참겠다는 말 같기도 하고 부디 잘 살라는 말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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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는 사랑하고 있었을 그 찰나가 바보처럼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 외에 보이는 것이 없는, 다른것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적이 있었다. 찰나였지만 그 찰나가 존재했었다는 기억으로 어떤 사람들의 관계는 지탱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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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한다. 낯선 곳의 커피는 언제든지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 앞에서 커피를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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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말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화살촉 같은 말이라도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말은 약이 된다. 사실 더 강하고 센 약이 내게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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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비겁한 것이다. 고백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모두 비밀이니 혼자만 알고 있어달라고 한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비밀이라면 죽어서도 당신이 갖고 가야지. 털어놓고 싶어서 말해놓고선, 가벼워지고 싶어서 말해놓고선, 폭로하고 싶어서 말해놓고선, 어디다가 감히 고백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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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을 가만히 만져본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향기는 모두 날아갔다. 사는 일이 다 식은 커피 같을 때가 있다. 함께 사는 일은 어렵다. 헤여져 사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니 함께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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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고 싶을 때가 있고, 함께 살고 싶을 때가 있다. 함께 있고 싶을 때는 마주앉은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이고, 함께 살고 싶을 때는 아침을 함께 맞고 싶을 때이다. 아침을 함께 맞는 일은 경이롭지만 함께 사는 일이 허망한 것은 결국에는 서로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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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디선가 먹어본 것을 혼자 만들어 먹어보는 일은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음식을 그 사람을 생각하며 먹어보는 일처럼 의미가 있다. 그냥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으며 질감을 느껴보는 일. 그러면서 그날의 바람과 기온을 기억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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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책 읽은 것과 여행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남는다고 하지만 가정 먼저 슬며시 사라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들은 멀리멀리 사라 진다. 그들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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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대로 정해지는 것이 향기라면 사는 대로 정해지는 것이 냄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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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이마를 보면 고뇌의 무게가 느껴지고 사람의 손을 보면 살아온 시간이 보인다. 사람의 발을 보면 그의 일생이 보이듯 왓 프라마하탓에서 무게, 시간 그리고 수많은 생명들의 눈물서린 목숨이 느껴진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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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는 사람을 자꾸 부르면 그 사람은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겠지요?˝
˝네.˝
˝사람에게는 갈 길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서 좋은 몸을 받아 잘 살길 바라신다면 꼭 그렇게 하십시오.˝
˝네.˝
집에 돌아와서 식탁 위 르동 그림을 종이에 싸서 옷장 위에 올려두었다. 오랫동안 옷장 위를 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하늘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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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는 철학이었다. 서비스 마인드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높은 가치이다. 친절한 것과 다른 차원으로 손님의 입장에서 손남의 요구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능력이다.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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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아프다. 사는 일이 빚 갚는 것 같아 살기 싫어질 때가 있다. 함께 사는 일은 빚을 갚는 일이다. 그런데 빚을 갚는 일 안에 또 빚을 지는 일이 생긴다. 그것을 가장 경계하는 편인데 좀처럼 쉽지 않아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음을 느낄 때,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곳은 지금보다 더 처참한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 늘 이곳에 나를 머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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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서 일어나서 성당 문을 열고 나왔지만 그곳에 나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안다. 돌아오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나를 그곳에 두고 옴으로써 어떤 나와는 이제 헤어질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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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니라 순간을 선물 받았을 때의 고마움은 잊히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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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으르렁거리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좋은데 멀리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미워도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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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로운 것에 강하지만 쓸슬한 것에는 허물어지는 사람이다. 외로운 것과 쓸쓸한 것은 다르다. 외로운 것이 단단한 벽돌이라면 쓸쓸한 것은 부서진 벽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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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 어떤 눈빛도 잊히지 않는다. 읽고 먹는 것이 내가 된다. 울던 사람이 다시 오면 게이샤 줄리엣을 내려주고 싶어서 나는 지금 게이샤 줄리엣을 구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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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책을 읽고 난 후기를 2편에 나눠서 써보는 것 같네요. 13월에만나요 를 읽기 전부터 추천을 받았던 책이었는데, 안 읽었다면 크게 후회를 할 뻔했네요. 커피를 마실때면 언제든 이 책이 생각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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