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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평점 :
책 서두에 나오는 시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
나무여, 이렇게 잘려 나간 모습이라니,
이렇게 기이하고 낯설게 서 있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네 속에 반항과 의지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나는 너와 같다. 고통스럽게 베어지는
삶을 끝내지 못했고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내 안의 연약하고 부드러웠던 것을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는 것.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가지를 수백 번 찢어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틔워 내고,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헤세의 마음과 생각이 이 시 한 편에 오롯이 드러난다.
헤세는 삶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불구덩이 같은 모순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헤세는 다시 말한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길이라고도 말한다. 헤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고결하게 저 위쪽 어딘가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삶을 마감한 이도 아니다. 헤세는 전쟁을 반대했으며 서양 중심주의를 비판했고 인간과 자연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 책은 서간집은 아니지만, 많은 편지글이 나온다. 자신을 존경하는 이에게, 사랑하는 아들에게, 또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편지로 자신의 진실한 마음과 생각을 담아 보낸다, 때론 담담하게 때론 사랑을 담아 또 때론 따끔한 회초리를 담아서.
글을 쓴 이는 헤세지만 이 책을 만든 이는 편집자 폴커 미헬스다. 그는 헤세의 유고집을 편찬하고 헤세를 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43년생인 미헬스는 헤세의 공향 칼프에 헤세 박물관을 건립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으며 은퇴 후에도 헤세의 작품을 연구하고 편집하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그동안 몰랐던 헤세의 말과 글들을 찾아서 잘 엮어낸 이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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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단 인간이 새와 개미보다 결코 더 중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볍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삶의 잔혹함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원망스럽게 받아들일 게 아니라 그 절망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수긍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그 소름 끼치는 무의미함을 온전히 인정할 때에야 그 거친 무의미함에 맞설 수 있고, 거기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자 유일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동물이 더 잘합니다.-1931년 한 편지에서 - P20
네, 인간성에 절망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절망 또한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기에 우리는 이성과 인내로 버텨야 하고, 안 되면 멋쩍은 유머를 동원해서라도 이겨 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1949년 8월의 한 편지에서 - P24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신뢰다. 나는 내 아버지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해마다 내게서 생겨나는 수천 명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씨의 비밀을 지키며 살고, 다른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신이 내 안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소명이 거룩하다고 믿는다. 나는 이런 믿음으로 산다. - P31
안으로 가는 길
안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은, 불덩이 같은 자기 침잠 속에서 지혜의 핵심을 예감한 사람은, 신과 세계가 이미지와 비유로만 감각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알아챈 사람은 모든 행동과 생각이 자기 영혼과의 대화가 된다. 세계와 신을 품은 영혼과.-1918년 2월 8일 - P97
돌아보면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 정신의 작업, 성경과 철학, 이 모든 것 속에서 이루어진 ‘발전’이 수천 년 동안 무척 미미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부터 토마스 폰 아퀴나스 또는 에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 외양만 계속 바뀌었을 뿐 그 안에 담긴 진리는 항상 동일했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 진리는 세상과 대중이 아닌 아는 자들만 깨닫는데, 그렇게 아는 사람은 항상 소수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는 자신을 감싸고 숨겨 주는 대중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대중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처럼. -1937년 10월의 한 편지에서 - P136
깨어남
고요의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폭풍은 깊이 침묵하고, 고통은 완전히 가라앉고, 영혼은 잠들었다.
그러다 오늘 나는 깊은 어둠 속에서 깨어난다. 사위가 온통 깜깜한 밤이다. 마비된 것 같은 긴 휴식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내 심장은 불안한 조바심으로 빠르게 뛴다. 과거의 열정들이 오래전에 나은 상처에서 환하게 새로 분출되어 활활 타오른다. 영혼이여, 지금 깨어났는가? 수면과 휴식은 끝났는가?
보라, 영혼은 고통과 어울린다. 새로운 폭풍에 유쾌하게 맞서리고 결심하고 파르르 떨며 영혼의 복된 동지인 하늘의 모든 별들에 미소 짓는다._1903년-1910년 사이 - P191
불만이 많은 사람에게
나는 네가 세상을 향해 욕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어제와 똑같이 요지부동이고, 너의 증오는 세상을 머리카락 하나 바꾸지 못한다. 인간은 원래 부패한 족속이다. 그렇다면 너는, 과연 너는 선한가? 나라면 사랑으로 세상에 다가가 볼 것이다. _1902년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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